유행과 코드라는 것

언젠가부터 절감하는 건데 유행처럼 커다란 개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시대죠.
유행: 덧없는 진리이자 강력하고 공허한 명령 같은 것. 
굳센 희망이나 확실한 기쁨이 없을 때, 자기 삶의 맥락에서 별 의미 없는 유혹에 빠져들기 쉬운 것 같아요. 제 눈엔 대부분의 사람이 이식된 쾌락에 불과한 수많은 코드들을 학습하며 검토하고, 음미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또 다른 코드에 시선과 정신을 빼앗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설핏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라는 의문이 스치긴 하겠지만, 답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고 마는 것 같아요.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 역시 문화를 생산하지도 감상하지도 않은 채 필터링하고 내다 버리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아요. 마치 그것이 적절한 행위이자 목표라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달려온 기분이 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생산자가 될 만큼의 능력이 제겐 결여돼 있는데, 그러면서도 감상자의 역할만큼 지겨운 게 없어서 비평/해설도 하기 싫은 감정에 빠져들 때가 있어요. 매순간 이게 취할 만한 예술이며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식인가를 확인하는 행위. 그 필터링의 반복을 몹시 공허하게 느끼는 중입니다. 성의 있게, 성실하게 감상하는 자체가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왜소하더라도 오히려 날 것의 일상만으로 지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라는 회의가 자주 듭니다.

자연스럽게 서서히 자라나, 어느 시점에서 표현과 형식을 욕망하게 되는 결과로서의 '코드'가 아니라면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상품이자 정치적 전략으로 남발되는 코드들의 고압선 아래에서, 삶은 혼란스러움을 배가시킬 뿐 즐거움에 기여하지 않습니다.
바르트가 명명한 '에덴의 감수성' - 하늘을 하늘, 나무를 나무, 사람을 사람이라고만 받아들일 수 있는 소박하고 솔직한 감수성 - 은 어쩌면 유토피아만큼이나 이상적인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코드란 뭔가를 '약호화' 하는 것으로 일종의 자동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화됨으로써, 의미들의 복합체가 단일한 시니피앙처럼 기능하게 되죠.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분절하고 낯설게 하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아무거나 받아마실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요즘 제가 자신에게 주문하는 건 '그러니 해설함으로써 인정하지 말 것. 해체하고 변형할 것.'

뻘덧: 어제 <백남준아트센터>에 갈 일이 있었는데, 가이드를 맡은 분이 용무가 끝난 후 잡담 타임에 이런 말을 하셨어요.
"조용/나직하면서 핵심을 찌르려고 하는 말투를 가지셨어요. 의미없는 잡담을 즐기시지 않죠?"
뭐랄까. '오캄의 면도날'과 '다모클레스의 검'이 함께 겨눠진 듯한 질문이라 당황스럽더군요. 답례로 '물계자의 검'을 날려볼까 하다가 빙구 미소만 짓고 말았죠. 낯선 이와의 대화에서는 나이브하게 느낌을 음미하기, 느낌을 언어로 스크래치내지 않고 그저 내버려두기가 원칙이라. - -

    • 사람 정신이 평생 오락가락 하는거라서,이겨

      사는게 습관인 사람도 많이 있다지만
      • 언제 날잡아서 가,영님과 선문답 놀이 함 해볼까, 하는 충동이. ㅎ
    • 패션 아이템, 인기 영화에 이어 사람의 사고마저 유행에 따르는 시대가 왔죠.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신 커뮤니티 내에서 유행하는 밈에 따라서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현상을 보면 사고의 병렬화라는게 먼 SF속 이야기도 아닌것 같아요.
      • '사고의 병렬화'라는 표현이 머리에 쏙 박히네요. (오싹)


        유행도 한 개인의 확고한 신념, 의식, 취향에서 출발했겠죠. 그걸 대다수가 공감없이 공유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인 거고요. 언젠가 독일인 동료가 한국에 와서야 '유행'이란 게 뭔지 실감했노라 말해서 삐죽 & 끄덕끄덕한 적이. - -


        그저께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그 사통오달의 지력를 가진 예술가를 대하며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의 시대만 해도 르네상스형 인간들이 상당히 있었지. 지금은 자취를 찾기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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