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예쁜 시인 2

1.모로코 출장을 끝내고 주말을 런던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조카도 보고 싶고, 어제가 형부 생일이기도 해서 회사에서 마련한 보너스 프로그램을 사양하고 왔어요. 부질없는 생일파티 같은 건 하지 말자며 형부는 말렸으나, 삭막한 타향살이를 견디기 위해선 관습적인 행위가 개입되어야 한다는 듯, 저는 굳이 마라케시에서 봐온 장으로 모로코 식 생일상을 차리고 만... 거시었던, 거시었던, 거시었습니다. - -

솔직히 말하면 독신자가 가정이라는 공동체 생활에 합류하는 건 전시 체제로의 돌입을 의미합니다. 존재의 에너지가 쉼없이 야기하는 혼란을 황망히 수습해가며 순간 순간을 버텨내야 하거든요. 도착해서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저는 그렇게도 고즈넉하고, 그렇게도 단순하고, 그렇게도 너른, 혼자만의 시간이 그리워 하늘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어요.

그러나 한편, 제 맘 속을 파고드는 햇볕 같은 따스함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군요. 이 세상의 기쁨이란 얼마나 자주 상대방의 시선에서 아름다운 내부를 발견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인가요! 이모의 방문에 조카는 새벽까지 눈을 반짝이며 돌돌 말리는 한국어 발음으로 자신이 보고 겪은 세상의 얼굴에 대해 조잘대었습니다. 또한 경쟁하 듯 서로의 비행을 들추던 부부의 토닥질은 또 얼마나 유치하면서 간지럽고 귀엽던지.
웃음이 폭죽처럼 터져오를 때마다, 꿈속도 아닌데 저는 '이곳, 참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대단치 않은 말들, 생의 별다른 지표가 되지 않는 소소한 말들이 보여주는 풍경의 아름다움이여~

2. 조금 전, 이모 곁에서 자겠다며 거실에 마련된 제 침구 속으로 들어와 누은 아이가  이렇게 속삭였어요. 키우던 화분 하나가 시들었는데 그게 몹시 마음 아팠던 건가 봐요.
"eemo~ 꽃들은 죽었는데 난 살아 있어요.
- 음. 꽃들은 내년에 다른 꽃으로 다시 피어나. 니가 물을 주고 하루에도 몇번 씩이나 바라봐 주었기 때문에 꽃들은 그동안 굉장히 행복했어.
" 아니, 이제 그 꽃들은 다시 피지 않아요.
아이는 양 손으로 세차게 눈을 문지르더니 이불 속으로 얼굴을 숨겼습니다.
- 우니?
"아니에요. 이제 잘래요.

아이는 금방 잠들었고, 저는 어둠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이답지 않은 말이었기에 놀라워서 정신이 멍했어요. 죽은 꽃과 살아갈 삶의 날카로운 대조가 아찔하게 다가왔습니다. 아이의 작은 입에서 무심하게 흘러나온 죽음과 삶의 대위에 사로잡혀 오래도록 저는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어요.

좁은 대위법은 너무도 날카로워서 저는 견뎌내기 힘들고 두렵더라고요. 그래서 제 삶을 커다란 대위법 속에 던져 넣으며 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낮과 빛을 묘사하는 목소리를 부상시키자, 그 시간을 연장하자! 밤과 어둠, 침묵의 울림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

3. 낮엔 이 집 앞마당에서 록콘서트가 열렸습니다. 조카가 작년 말에 결성한 록밴드에 장비가 비싼 드럼 파트를 확보할 수 없어  애태우는 꼴을 보다 못해 제가 그 비용을 후원했는데, 그에 대한 감사의 공연이었죠. 
이 4인조 밴드의 연주는 허황하기 짝이 없었으나 꾸민 외모와 퍼포먼스가 같잖게 귀여워서 이 밤까지 미소 짓고 있어요. 모두 헤어밴드를 한 예수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건 그러려니 수긍하겠는데,  형부 포함, 멤버들 아빠 모두가 아이들과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 (근데 왜 로커는 머리를 기르는 관습을 갖게 된 거죠?)

(뻘글: 이번에도 언니와 형부는 제가 후원한 악기 금액 중에서 150파운드를 쓱싹 꿀꺽했습니다, 이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런던 경찰청에 고발하고 싶은 맘이 굴뚝 같습니다. -_-)

4. 출장이든, 여행이든, 방문이든, 다른 장소란 다른 시간을 의미합니다. 현재지만 그것은 저의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시간대예요. 그런데 그 현재는 제가 사는 현재의 감추어진 얼굴을 보게합니다. 그 얼굴을 사랑하는 마음이 제 삶에서는 가장 오랜 주인이었을 거예요. 비록 친구들에게서는 '사람을 곁에 붙이지 않고 탁탁 털어내는 스타일'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사람이지만.

    • 예전에 드럼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집에 드럼이 있어야 연습을 할 테고 방음이 된 방이어야 할 테고...


      10년 후가 될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제 집을 짓는다면 방음 잘 되는 방을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루어지든 말든 어떤 계획을 하나씩 세워보는 건 즐거운 일이네요. 

      • 드럼은 악기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소리를 내죠. 밴드의 가장 뒤에 위치하지만 소리는 관중의 귀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 마음을 움직여요.
        언젠가는 드럼 파트가 뛰어나다는 Guns N' Roses의 곡들을 연주해보시는 날이 오길...  - -

      • 학원에서 배운다면 집에서는 연습 패드로 연습하거나, 전자 드럼을 들여서 헤드폰 끼고 연습하는 방법도 있을 것 같아요! 레알 드럼을 두드려대는 맛에야 비할 수 없겠지만.. 소싯적에 밴드 동아리방 기웃거리던 때가 생각나네요. 신입생들은 패드부터 열심히 두드리는 인고의 시간 다음에야 드럼 의자에 앉을 수 있었던..ㅎㅎ  

    • 안돼 언니형부 왜 횡령해요 ㅠ

      • 학창시절 친구들이 하소연하길, 세뱃돈을 위시한 어릴 적 이런저런 수입을 부모님이 보관/관리해주겠다며 거둬가선 꿀꺽하고 말았다더라고요. 우리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셨거든요. 대체 언니는 어디서 그런 횡령수법을 익혀서 써먹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ㅋ

    • 글이... 너무 반짝반짝하네요ㅠ 읽으면서 괜히 뭉클했어요
      • 뭐가 반짝이는 걸까? 갸우뚱하며 제 글을 정독해봤어요. - - 결론은 Sonny님은 움직이는 먼지 하나에도 반짝임을 느끼실 분이라는 것.ㅎ

    • ㅎㅎ 조카가 너무 사랑스럽네요.
      • 친화력 캡짱왕인 아인데, 공연 중 소음에 몰려든 이웃 관객을 대하며 이런 소회를 밝혀서 깜놀했어요. "그들은 신의 얼굴처럼 무서웠어요~" (종교 없는 아이임.)
    • 언제나지만 어디서든 애들을 보면 사는게 뭔가 아직도 그러네요
      • 저도 평생 같은 의문을 품고 살 듯합니다.
    • 어딘가 번역체 같기도 한ㅎㅎ 한 편의 수필 잘 읽었어요. '독신자가 가정이라는 공동체 생활에 합류하는 건 전시 체제로의 돌입을 의미합니다'에 공감.. 

      • 제가 우리나라 문장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고 김현 평론가 글을 처음 접했을 때, 번역체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 글의 번역투는 비문과 오문의 결과지만 김현 선생의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묻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뻘바람을... 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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