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과 동정

회의에서 프로젝트의 진행 방향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의와 분별을 아는 사람들인데 어제는 좀 이상했어요. 상대의 의견을 제압하려고 나쁜 방식으로 서로를 자극하더니, 급기야는 일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사적인 감정의 대립으로 치닫고 말더군요.
국적이 다른 A와 B가 있습니다. A는 B를 경멸한다고 했고, B는 A를 가엾게 여긴다고 했어요. 경멸과 동정. 어떤 게 더 견디기 쉽고,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우울한 의문입니다.

어느 사진집의 평문에서 '초점을 맞출 수 없어 우리는 상처입는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습니다. 피사체의 윤곽이 겹쳐지고 흐릿하게 초점이 잡혀 있는 사진들이었는데, 평론가는 그 사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선명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상처받았노라는 감상을 적었어요. 제게 어필한 표현이자 사고였습니다.

(주:  Michal Rovner/Nun )
http://www.baldwingallery.com/archive/exhibitions/2001/0301mr/mr_nun2.htm

A와 B의 대립을 관망하노라니 새삼스레 그 사진들이 떠올랐고, 그 표현이 보다 잘 이해되는 느낌이었어요.
바라본다는 행위에 대한 강력한 저지를 내장한 이미지는 얼마나 인식비판적인가요! 더구나 피사체는 인간이었습니다. 아마 사진가는 그 작품들을 통해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보여주고자 했을 거에요. 그토록 어둑하고, 서늘한, 인물사진들로 말입니다. 그러니 상처받는다는 표현보다는, 상처를 되살린다는 말이 더 합당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또렷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흐릿함이 때로는 관계의 자비로움일 수도 있을 거에요.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우린 또 얼마나 관계들을 원하는가요! 
그러니까 흐릿함 안에 집을 짓고, 길을 놓고, 태양을 띄운 뒤, 비틀비틀 걸어가는 겁니다.  서로 손을 잡거나,  손을 잡지 못한 채.

덧: 두 사람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어릴 때 할아버지가 선물하셨던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이 생각났어요.  그때 제 눈을 맞추고 남기셨던 이 말씀도.
" 이 인형 시스템은 끝없이 나오는 인형들을 즐기라는 놀이가 아니라 '인간은 깊다'는 적나라한 진실을 보여주는 거란다."


    • 격렬한 논쟁이라니.. ㄷㄷㄷ

      속으로 각도기 쟤면서

      좋은 건 훔쳐서라도 당기고, 잔돈 안 남는 거 앞에선 죽은 척하는 제 생활을 반성하게 되네요

      나는 왜 자꾸 시시한 어른이 되어가나?
    • 최고 할아버지셨어요 경멸과 동정은 하나씩만 가지는게 아니란 생각이 드네요 항상 나와 비교하지 않으면 생각을 못하니까요 지이야기 하지 않는 소설가가 대단하단 말을 들었는데 흐릿한 사진 이야기 좋아요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흐릿함이 관계의 자비로움이란 말, 너무 공감합니다.

    •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믿는 바를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사람들이니까 저런 상황도 생기는 거 같아요. 피곤함과 책임이 늘어나는건 무조건 피하고 싶은 사람들끼리만 모이면 저런 풍경도 볼 수 없을거에요.
    • 마트료시카 인형에 대한 할아버지의 말씀이 인상깊네요.
    • 여러부운~
      어제 A와 B를 꼬드겨 제가 술자리를 마련했답니다. 근데 밤새 속이 완전히 뒤집어져서 생고생을 했어요. ㅜㅜ
      제가 이래뵈도 대학 졸업여행을 교수님 술대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며 친구들이 경비거둬서 끌고갔을 만큼 알콜에 강한 사람인데 이게 무슨 참변이란 말입니까. 주종도 노화방지에 으뜸이라는 포도주였건만.

      이제 더 이상 알콜노동을 감당할 수 없는 체력인가봐요. 주막의 주모 역할이 자신 있었는데 이젠 무망한 꿈으로 돌려야하는 나이가 됐나봐요. 알콜이 해마와 전전두엽을 자극하는 걸 즐겨선 안 된다는 경고를 제대로 받고 있네요.
      엉금엉금 기어서 출근할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그래도 A와 B에게 호두껍데기 같은 앙금을 깨고 서로 속살을 나뭐먹는 시간이 되었다면 뭐..... 
    • 그나저나 여영국 의원이 역전승했다니 얏호! hurra!  hooray!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4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38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48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5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0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1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6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8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4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29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3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6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6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2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5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