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양지바른 언덕

저에겐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친구가 있는데요 12월 말쯤에 이 친구의 생일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늘 송년회 겸 이 친구 생일파티 겸 그렇게 12월에 꼭 만나죠. 초등학교 1학년 이후로 단 한 번도 이 친구 생일을 안 챙겨본 해가 없어요. 물론 제 생일도 이 친구가 늘 챙겨줬지요. 그 애에게 어울릴만한 카키색 점퍼를 사뒀습니다. 사실 전 코트를 좋아해서 이 친구도 코트를 사주고 싶은데 매장에 데리고 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양할 아이라서, 그렇다고 제가 맘대로 코트를 사자니 코트는 자기 몸에 맞는 핏과 디자인이 뚜렷한 영역인데다 이 친구는 코트보다는 점퍼를 좋아하는 취향인지라 적당히 아무데나 외출용으로 막 입기 좋은 예쁜 걸로 샀어요.

사실 베프가 이 친구 한 명이에요. 나머지 저의 인간관계는 적절한 거리감을 둔 그런 무해무익한 관계들로 구성돼있어요. 아무런 이해타산과 소속감이 없는 그런 지인들요.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인. 꼭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이 친구와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이 내내 사이좋게 잘 지내와서 다른 친구를 둘 필요를 못 느낀 부분도 있는 것 같고, 제가 무리를 지어 어울려 다니는 걸 안 좋아하기도 하고. 신기하게 어딜 가나 잘 어울리고 성격 참 동글동글한 이 친구도 베프는 저 한 명이에요.

저는 이 친구를 늘 “나의 양지바른 언덕아” 라고 불러요. 이걸 카톡이나 편지뿐 아니라 육성으로도 불러요. 어떤 분들이 보면 오글거린다고 기겁하시겠죠? 그렇지만 사실인걸요. 이 친구는 어둠의 자식도 아니고 형제가 많은 집의 막내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런지, 마음에 뒤틀림이 없고 생활은 성실하고 성품은 순한데다 자신의 단점과 장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남과 비교하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에요. 색으로 치면 개나리색 같은 친구죠. 물론 타고난 밝음과 순탄한 인생살이의 필연적인 결과로 어둠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서 가끔 자기 딸아이도 엄마는 이런 감정에 대해 절대 모르세요 한다지만. 저는 이 친구의 그 안정감과 밝음이 좋아요. 그 밝음이 워낙 태생적인 거라서 타인에 대한 멸시를 감춘 교만한 밝음의 폭력성과는 다른 근본적인 따스함이거든요. 양지바른 언덕의 그 따스한 햇빛처럼요. 눈 아프게 새하얗고 차가운 형광등이 아닌.

그리고 이 친구의 신기한 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거예요. 저는 사실 죽을 때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에 둥둥 떠다니는 내 시커먼 덩어리 같은 걸 상상하면 너무 무섭거든요. 어둡고 차가운 공간에 형체 없이 희미한 자각만 있는 채로 떠 있는 그런. 그런데 나의 양지바른 언덕 베프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덤덤하게 얘기해요. 음 워낙 마음이 안정적이고 견고한 아이라서 그런 건지, 고등학교 때와 성인 이후에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보낸 경험이 바탕이 된 것인지. 여튼 이 친구는 죽음이 두렵지 않대요. 우리가 만나고 헤어질 땐 늘 서로 꼭 포옹을 하는데 가끔 이 친구가 눈물을 글썽이며 “아휴 아쉽다” 라고 말하면 왠지 마음이 조금 슬퍼져요. 이렇게 만날 날이 혹시 우리의 생각보다 얼마 안 남은 거고 10년이 금세 지나서 어머 벌써 10년이나 지났니? 할까봐.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래 어제와 오늘과 내일만 생각하자 하면서 쓸쓸함을 여미죠.

뭐 먹을래? 물으면 난 너 먹고 싶은 거면 다 좋아
어디 갈래? 물으면 난 너 가고 싶은 곳이면 다 좋아 대답하는 내 친구.
예쁘고 새침한 고양이와 웃기게 생겼지만 진중한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고, 아들딸도 키우고 남편도 키우는 내 귀여운 친구. 웃는 모습이 영심이 같고 몸이 유연해서 발등을 120도 각도로 꺾을 수 있는 친구. 동물 울음소리 흉내를 기가 막히게 잘 내며 욕은 하지 않고,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 같은 건 한 적이 없는 나의 양지바른 언덕.

어서 보고 싶네요.
12월이 되면 늘 이 친구 생일 선물 궁리부터 해요.
여러분의 베프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시간되시면 한번 해주세요. ㅎㅎ
    • 이거 만화에서 봤어요 이 친구 정체가 알고보니 지구인을 포섭하러 온 외계인인데 감각이 예민한 어느 친구는 누구나 다 좋아하는 이 친구를 볼때마다 아무 이유없이 기분이 나빠진다고 하죠.  

      • ㅎㅎㅎ 큰 웃음 주시네요. 캡쳐해서 베프 보여줘야지 @.@
    • 정말 부럽네요. 죽으면 내 존재가 아예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덜 두려운 것 같아요. 

      • 그걸로 두려움을 눌러보려고 애써봤는데요 쓸데없이 상상력만 많아서 자꾸 죽은 후의 무서움 같은 걸 생각해요. "우리는 왜 죽을까? 언니 넘 무서워" 같은 얘길하는 아는 동생한텐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 값진 거다 어쩌고 멋있는 척이나 하면서 실은 넘 쫄보인 거 있죠 망할 것아.. 제 베프가 부러워요.
    • 좋은 친구를 두셨네요.

      마치 빛, 내지는 태양과 같은 존재를 가졌다는 사람들은 종종 봤지만, 저와 친구들은 잘해봐야 각기 손으로 수동 발전기를 돌려 머리 위의 꼬마 전구에 불을 켜야하는 사람들이네요.
      • 전 가끔 흔들리는 촛불이나 켜는 인간인지라 ㅎ 게다가 심지어 이런 사람들한테 애정과 관심을 느끼고....
    • 각자의 굴에서 거의 안 나오기 때문에 그럭저럭 오래 관계가 굴러가고 있습니다.

      아마 굴에서 나오든 말든 비난하지 않는 성격인 것도 도움이 됐겠지요.


      하지만 자기 굴 밖의 일에 별 관심이 없어서 비난이든 뭐든 안 하는 것 같기도 해서, 혹시 우정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뫼비우스의 굴' 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친구는 가까운 사람에게나 먼 사람에게나 꽤 쾌적한 사람이에요. 저 사람 참 짜증난다는 것과 완전히 반대죠. (배우자나 아이에게 어떤 사람인지까지는 모르겠군요)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편인데 왜 하필 저랑 엮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의심이 굴을 향해 가게 되어서 이만 줄입니다. (__;)
      • 쿨한 굴이 까딱하면 콜드한 굴이 되는 수가 있어서 쿨함까지만 유지하려면 그것도 꽤 일관성과 조절이 필요한데 쿨을 잘 유지하는 사람들은 참 편하죠. 측은함과 애틋함은 그닥 없지만. 근데 왜 자꾸 이 굴이 아니고 그 굴이 연상되죠;; 미쳤나봐....헙.
    • 인간미 좋고 많은 사람 만나기 어려운데 좋은 친구 두셨네요

      • 따뜻한 칭찬 감사합니다
    • 기분을 좋게 하는 글이네요. 최근 이 게시판에서 올라온 글 중에 가장 좋았어요.
      • 도움이 되는 정보 같은 것도 아니라서 바낭글 쓸때마다 망설이게 되는데....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 햇수를 센다는 게 별 의미도 없지만...전 27년이나 만난 베프와 절연했네요... 100개의 이유가 있다고 하면 한93개쯤? 제 이유로요.

      베프와 이세상 엔딩씬 찍을때까지 변함없이 잘 지내시길. 평생의 대부분을 친구로 지낸 누군가와 맞이하는 인생의 저녁은 어떤색으로 물이들까요? 저는 이제 알수없어져서 마냥 궁금합니다.
      • 저도 실은 20년 만난 친구와 헤어졌어요. 나의 양지바른 언덕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친구였고, 음 뭐랄까 가식 없는 솔직함이 가장 큰 장점이던 친구였는데 언젠가부터 그게 무례와 상스러움으로 발달하더라고요.. 결국 못 견디고 떠났습니다. 쇠부엉이님도 27년 관계를 정리할만한 이유와 그 이유를 이해하고자 했던 시간들이 있었겠다 생각하니까 어쩐지 마음이 스산하네요.. 그리고 축복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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