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저는 평일 저녁에는 매일 운동하러 가는데 보통 20분 정도 걸어서 가요. 


요즘 나뭇잎도 파릇파릇해졌고 꽃도 알록달록 피었고 나무 위에서 새도 짹짹 울고... 걷는 동안 눈과 귀가 바빠졌죠.


그런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하늘을 떠도는 공기 속의 한 가닥 향기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어요. 라일락이죠. 


라일락은 언제나 향기로 거기 있다는 걸 먼저 알려주는 꽃이에요. 눈으로 보지 못했어도 공기 속에 떠도는 향기를 들이마시며 


아, 근처에 라일락이 피었구나 하고 알게 되죠. 그 순간이 참 좋아요. 그리웠던 사람이 어느새 제 곁에 다가와 있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어떤 때는 반가운 마음에 두리번 두리번하며 라일락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냥 숨만 깊게 들이쉬며 천천히 걸어가죠.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 곁에서 향기로 감싸주는 것을 느끼며 걸어가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에요.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눈 앞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냥 이별인데, 그래서 발걸음을 떼는 순간 마치 등을 돌리고 헤어지는 기분인데 


라일락은 한참 동안 그 향기로 제 몸을 감싸며 함께 걷는 거죠. 시각적이기보다는 후각적이고 촉각적인 꽃이죠. 


한참 붙박이로 서서 지켜보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돌아서야 하는 다른 꽃들과는 달리 


라일락은 굳이 눈 맞추지 않아도 애써 지켜보지 않아도 곁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알 수 있고 매번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함께 걷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꽃이에요. 그래서인지 라일락에게서는 뭔가 먼저 사랑받는 느낌이 들어요. 


향기를 내뿜는 꽃들은 이렇게 먼저 다가와서 여기 와 있다고 알려주고, 부드러운 공기로 살며시 안아주고, 


굳이 마주보며 지켜봐 주지 않아도 즐겁게 나란히 걷다가 조금씩 살며시 눈치채지 못하게 사라지는 다정한 연인 같아요. 


다른 예쁜 꽃들은 제가 먼저 찾아보지 않으면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어서 의식적으로 열심히 찾아봐야 하는데  


라일락은 그럴 걱정이 없어요. 숨을 안 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놓칠 걱정 없이 먼저 다가와서 향기를 뿜으며 기다려주는 꽃, 


놓칠 걱정 없이 느긋한 마음으로 편안히 만날 수 있는 꽃이죠. 


아련하게 피어나는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 아, 이제 4월이구나, 이제 진짜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신기하게 후각은 시각보다 뭔가 더 아련한 기억을 불러오는 것 같아요. 후각이 뭔가 더 감정과 연결된 감각인 것 같아요.  


아침에 일찍 못 일어났던 저는 도서관에서 제일 나쁜 자리, 화장실 바로 앞 자리에서 중간고사 시험 공부를 했었는데 


화장실 냄새를 막으려고 교정에 피어 있는 라일락꽃 몇 송이를 따다가 코에 대고 살랑살랑 흔들며 신나했었죠. 


(공부는 안 하고 라일락 앞에서 콧구멍만 벌름벌름하며 황홀해 했던 기억이...) 


라일락은 어느 날 문득 향기를 내뿜으며 다가와 언제나 먼저 아는 척해주고 먼저 안아 주고 천천히 함께 걷다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히 사라지는 정답고 사려 깊은 꽃, 그래서 왠지 더 그리운 꽃이에요. 





    • 반가워요. goddusk 님 ^^ 


      근처에 라일락 군락이 있다니 정말 좋은 데 사시는군요. 


      지금 듣고 있는 라일락 노래 하나~ 




      Julie Andrews - We'll Gather Lilacs in the Spring 






      음반 상태는 별로 안 좋지만...  


      Anne Ziegler and Webster Booth - We'll Gather Lilacs in the Spring 


    • 라일락이 피면 색깔이 다채로워져서 좋습니다.


      라일락만으로도 흰색, 분홍, 진분홍, 연보라까지 다양한 그라데이션이 펼쳐지죠.


      라일락 향기가 너무 강하다고 싫어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전 자기주장이 강한 향기가 좋아요.

      • 한번도 라일락 향기가 강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꽃들이 대부분 약하게나마 향기를 갖고 있다니 그 모든 향을 제치고 둔한 저에게 와 닿은 라일락 향이라면 


        강하긴 한 것 같네요. ^^ 


        이제 보니 가녀린 청춘의 향기가 아니라 뭔가 간절하게 말하고 싶은 게 있었던 꽃의 향기였나 싶기도.. ^^




        Eugenie Baird - Suddenly It's Spring 






        Dianne Reeves - Some Other Spring 


    • 라일락 향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꽃향기에요. 하지만 너무나 아쉬워서 나무옆을 떠나지를 못하게 하죠.


      하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만 피어있다는 거.

      • 실제 라일락과 비슷한 향기를 내는 향수가 있으면 한번 사볼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혼자 방에서 칙칙 뿌리고 킁킁 냄새 맡으면서 행복할 것 같아요. ^^ 




        Jo Stafford - I'll Remember April






        Sarah Vaughan - Do Away With April 


    • 저는 오늘 이문세 혹은 장재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들었어요! 가사에 라일락 나오지요
      • 라일락, 봄, 꽃에 관한 가요를 찾다가 갑자기 생각난 엉뚱한 노래들을 듣고 있어요. ^^


         


        이소라 -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이소라, 정준일 - 우리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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