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고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고 왔습니다. 얼마 전 듀게에서도 이 모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에 있어 여러가지로 의견이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저에겐 영화를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더군요.


꽤 오래 전 일인데, 제가 가고 싶던 공연이 매진이라 그 가수의 팬 커뮤니티에서 티켓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동행이 못 가게 되어 한 장 양도한다고요. 저에게 티켓을 양도하기로 한 분은 저와 동갑인 남자였는데 공연 직전에 만나서 자연스럽게 공연을 같이 보게 되었습니다.


공연을 보던 중 제가 여자 중에서도 키가 작아서 자꾸 까치발을 들고 무대를 기웃거리는 걸 그 친구가 보고는 갑자기 공연장 밖으로 나가더니 두꺼운 책을 몇 권 가져오더라고요. 바닥에 깔고 서서 보라면서요. 공연장에 흔히 비치되어 있을 법한 전단지나 얇은 잡지가 아니라 공연장 사무실 직원 책상에서 슬쩍 해온 게 분명한 그런 책이었어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정말 너무 놀랐는데 저에 대한 온전한 호의로 가져온 거라 그 자리에서 아니 남의 물건을 이렇게 함부로 가져오시면 어떡해요?”라고 거절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책을 가지고 돌아온 그 친구 표정은 제가 당연히 기뻐할 거라고 기대하는 얼굴이었고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최대한의 임기응변을 발휘해 바닥에 책을 깔고 그날 공연의 전단지를 그 위에 덮은 뒤에 올라가서 공연을 봤답니다. 그 이후론 공연에 집중을 좀 못했던 것 같아요. 방금 있었던 일의 충격도 꽤 컸던 데다 책 몇 권을 쌓고 그 위에 올라서면 물리적으로 꽤 불안정하기도 하고요.  


공연이 끝난 후 그 친구는 티켓 값 대신에 저녁을 사달라고 했고 저도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제 주변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형의 사람이어서 궁금했던 것 같아요.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음악이란 걸 듣기 시작한 계기가 국민학교 고학년 때 남의 차 문을 따고 이런 저런 걸 훔치곤 했었는데 그때 처음 카세트 테이프라는 걸 손에 넣으면서였다고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거의 집을 나와 생활했고 고1 때부터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고 했고요. 어린 시절엔 펑크록에 미쳐서 피어싱도 엄청 하고 머리도 막 세우고 다녔었는데 지금은 다른 음악들이 더 좋아졌다고도 했습니다. 제 눈엔 여전히 그 친구의 옷이 펑크 스타일로 보여서 좀 웃었네요. 돈을 벌기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는데 최근엔 식당에서 접시 닦는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왜 사는지가 궁금해졌다고 했어요. 생각을 하다 보니 살아갈 이유를 못 찾겠어서 자살을 시도했는데 잘 안됐고 그럼 어떡할까 하다가 절에 들어가기로 하고 집을 다 정리했대요. 곧 있으면 절에 갈 건데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가수 공연을 보러 왔다고요.


그 친구 얘기를 들으면서 당연히 제 얘기도 어느 정도 하게 되었는데 사실 저는 그저 평범한 외모에 보통의 회사에 다니는 사람인데 저를 너무나 대단한 사람으로 대해주더라고요. 자기는 너처럼 멋진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하면서요. 그런데 그게 되게 입에 발린 말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약간 슬퍼졌어요. 제 주변 기준으로는 제가 너무 평범한데 그 친구 주변엔 이 정도 학력자본을 가지고 안정적으로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고 그런 사람이 진짜 드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러고 지금 저는 앞날이 캄캄한 백수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ㅎㅎㅎ)


그 친구는 그 날 저와 헤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고 저랑 친해지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저는 음뭐랄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아요. 그날까지 그랬듯이 그날 이후로도 제 삶의 바운더리 안에는 이 친구 같은, 그리고 헤일리와 무니 모녀 같은 사람이 들어온 적이 없어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면서, 그 안에서 헤일리와 무니 모녀를 대하는 윌렘 데포 캐릭터를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그 친구로부터 한 번 연락이 온 적 있어요. 진짜로 산에 들어가서 절에서 지내고 있다고요. 머리를 빡빡 밀고 회색 법복을 입고 웃고 있는 사진이 첨부된 문자 메시지였습니다. 저는 답장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주 가끔 그 친구 생각이 날 때가 있고 그때마다 부디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기를 기도하게 되네요.




    • 이 글을 읽으니 저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네요. 초등학교 때 어떤 남자애가 툭하면 자기 손바닥을 칼로 긁어서


      주위 아이들을 놀라게 했어요. 피가 나게 하지는 않았지만 보는 아이들은 놀라고 무서워했죠. 


      저도 상당히 놀라고 무서웠는데 얘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을 하고 아이들의 반응을 보면서 좋아하니까 


      (얘의 흥을 돋워주고 싶었는지 ;;-_-;;) 와 신기하다 그런 거 어떻게 하냐고 묻고 재미있는 척했던 기억이 나요. 


      그다지 좋은 환경에서 사는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그런 행동으로 아이들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그 애가 좀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상하고 무섭기도 했고 하여간 뭔가 좀  


      다른 느낌이었죠. 



    • 얼마 전에 알게 된 친구와 이 영화를 함께 봤는데, 


      본문에 나와 있는 남자까진 아니더라도, 그 친구 입장에서 봤을 땐 제가 본문 남자와 비슷한 포지션(?)이었어요. 


      실제로 본문에 나온 내용과 비슷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요.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친구가 자꾸 헤일리와 제가 오버랩된다고 하더라고요.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벗어나는 외곽이 있는가 봅니다.


      마음이 뭔가 싱숭생숭해지면서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각자 위치도, 바라보는 세계도 다양하고 다르고 복잡한 것 같아요. 글 잘 읽었습니다. 내가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기껏해야 얼마나 좁고 한정적인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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