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 스피크 이틀 지난 후기



- 어떤 작품을 본 후에, 마음이 훅 쏠릴 때가 있는데요.


단점을 분명히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싶은, 무시해도 될 것 같은, 눈감아주고  봐주고 슬쩍 넘어가주고 싶은 마음 (제가 뭐라고-,-)


단순명료하고 시원한, 호방한 큰 글씨로 쓰인 추천사들처럼, 혹은 

얼큰한 해장국 광고 모델의 감탄사처럼, 그걸 따라하고 싶은 마음이 되어서


좋네! 아 모르겠고 좋은 걸로 합시다! 라는 마음이 들 때요^^;



뭔가 큰 장점에 홀리거나 에너지에 쏠려서 ‘뽕맞은’ 상태가 되는 건데, 하루 이틀 지나며 그 열기가 점차 식어가다보면 그렇게까지 열광할 건 아니었다고 머리를 긁적이게 됩니다.




- 그저께 <아이 캔 스피크> 보고 후기를 곧바로 쓰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아 이거 뭔가 아직 뜨거운 상태라 위험한데’ 라는 걸 감지하면서도 애써 누르려 했는데

어제 아침이 되자, 전 날에 쓴 글로 뒷통수가 가려워져서 수정하러 왔습니다.ㅎ



스포를 피하고 싶으신 분은 (뭐 이미 줄거리는 보도자료들에 다 나와있지만!) 아래 부분부터는 살짝 피하셔도 좋을 듯요!



1. 아무리 대충 뭐 넘어가주자, 라고 한다쳐도 각본은 좀 부족해요.

플롯상 어떤 인물이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우연히 거길 지나가고,

많은 걸 말로 설명해주고 (그 ‘설명’을 종종 담당하는 박철민 배우는 그런 책무를 지닌 대사들을 연기할 때, 자연스럽게 만들려고 일부러 포장하지는 않고 오히려 더 연극적으로 씹어주는데, 그 맛에 민망함이 오히려 덜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게 나름 재밌었거든요.ㅎ - 그러나 반대로 느낀 관객도 분명히 있을 듯), 

결정적인 장면에서 저 인물이 저 중요한 장소에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거며, (영어도 잘 하고 논리적인 척하기에 능한 캐릭터니, 어떻게든 해냈을 지 모른다고, 짐작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화해를 하기 위해 하는 싸움과 갈등, 

그리고 그 경사를 오르는 길이 다소 작위적이고, 

주인공에게 들려주고 싶은 대사를 여러 번 반복하고,


그런 것들이 걸그적거리는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제가 눈감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1-1. 그렇게 해서라도 영화가 다다르고자 하는 지점들에 잘 도착하고 그 지점들을 충실히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그게 플롯의 엉성함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순 없지요. 하지만 그 다음의 것들이 더 중요해서, 그 앞의 부실함에 대해선 부족하더라도 포기하고 가겠다, 라는 게 각본가와 감독의 선택이었다면, 거기엔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원래는 이러이러이러한 더 치밀한 과정이 있었는데 그게 사족으로 보여서 오히려 삭제했다, 라고 한다면 (결과물로 인정을 받아야하는 게 마땅하므로 비록 오점이 되어버렸지만) 과정에선 현명한 선택이었다 싶은 거죠.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건 섬세하게 쓸 줄 몰라서 못했다면^^;; 그건 뭐 능력부족이지만요. - 그리고 사실 결과물만 봤을 때 그건 알 수가 없으니.ㅎ 뭐 다 후일담이 되겠죠)



1-2. 그리고, 그렇게 어떤 것들을 포기하고 버림으로써 영화가 더 가벼워지고, 그 덕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면, 거기에도 또한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애초에 장르를 코미디를 선택한 것도, 그리고 플롯과 크게 상관없는 코미디적 장면이 많은 것도 (1-1에서 필요했을 보충 설명들과, 코미디를 위한 이 장면들 중, 러닝타임을 고려할 때 뭘 취하고 뭘 버릴지 선택을 해야했었을지도 모르죠), 영화의 지향점부터가 쉽게 가자, 하지만 꼭 그 지점에 이르르자, 라는 약속인 것 같거든요. 이 영화가 <노예 12년>같은 영화가 되고자 한 게 아님은 분명하니까요. 강조점은 달라졌겠죠. 그리고 그 선택이, 그 기대에 걸맞는 결과를 분명히 도출해냈다고 생각합니다.



2.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 

 큰 감동을 주는 나옥분의 캐릭터에 대해서도 곱씹어보면 석연치 않은 지점들이 있어요. ‘욕쟁이 할머니의, 알고보면 내면의 보송보송한 마음’의 캐릭터가 전형적이란 점은 플롯의 전형성과 더불어 차치하더라도, 꽤나 자기 주장 강하고 원톱인 그녀가 남자 주인공 형제와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게 (그놈의) ‘엄마밥’이라는 점은, 조금 불만이 들기도 해요.

 그런데 이런 걸 지적하기가 참 멋쩍어지는 게, 제가 생각하기에 나문희 배우는 ‘한국 사회에서 근현대사를 지긋지긋하게, 하지만 끈질기게 겪어온, 전형적인 바로 그 곱슬머리 (엄마) 캐릭터’를 기가 막히게 잘 구현해내는 배우라는 거예요. (바로 그 점 때문에, <하이킥> 당시에 저는 그녀와, 그녀의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좀 다른 느낌이지만)

 캐릭터성에 다소 편치않은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퐉 나오는 게, 그녀와의 밀착성 (그리고 당연히 연기력)에서 오차가 느껴지지 않아서, 관객 각자가 경험해 온, 그래서 각자의 상상 속에 남아있는 전형적인 심상 중 어떤 것을 탁, 터치해준달까요.


 새 시대의 새 인물을 그린다거나, 구 시대에 묻혀있던 새로운 인물 발굴이 목적이 아닌 이 영화에서 그 전형성이 참 기가 막히게 찰떡같이 잘 쓰인 것 같단 말이죠…


 소소한 아쉬움을 토로한 김에 하나 덧붙이자면, 그 중요한 순간에 그녀가 결정적 용기를 낼 수 있게 한 게 남주의 도움이었다는 점도 개인적으로 좀 아쉽긴 했어죠. 둘 사이의 유대나 연대가 딱히 특별한 건 없잖아요. 그러니까 겉으로 남은 건 그냥 유사 모자 관계로 정을 쌓은 남자 정도인 걸요. 플롯상의 아쉬움에 포함되는 부분일 수 있겠네요.


+ 나옥분이 수동적이지 않은 모습은 참 후련하고 좋았단 생각은 들어요. (‘히스테리컬’한 건 아쉽지만)




3. 그 밖에도, 과거 장면의 묘사가 포르노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선 별표 백 개 드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아픔에 공감한답시고 적나라한 재현과 얼굴 클로즈업에 집중했던 여타 작품들이 선택한 장면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그 조심성없고 성급했던 만행들을 얼핏 (오래 생각하긴 싫으니까) 떠올려본다면 더더욱 그렇죠.

 ‘응당 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그럼 어떻게’ 사이에서 잠시 생각을 고른 후, 단정하게 길을 주조한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 지경이에요.



- 뽕맞고 나와서 좋아하던 제가, 그러니까 분명 신파의 묘가 상당한 이 영화에 좋아요를 쓰면서,

 왜 ‘명량’, ‘국제시장’의 국’뽕’은 소스라치게 싫을까 생각해봤는데요.

 뽕 자체 보다, 그걸 ‘이용’해서 떵떵 주입해대는 그 세계관이 치떨리게 싫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의 국뽕은 뽕을 빼고 국만 남아도 그건 싫거든요.ㅎ

 

 그렇다고 해서, 세계관과 주장이 나랑 맞으면 그건 무조건 좋으냐,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오히려 더 까다로운 마음이 들어서, <변호인>은 보기 전에 혹시나 실망할까봐 조마조마하며 한참을 미뤄놨었고, 삼성 백혈병을 다뤘던 <또 하나의 약속>은 보면서 엄청 화가 났었어요. (왜 이렇게밖에 못 만들었냐고.) 또 어떤 영화들은 한없이 쓸쓸한 마음이 들죠. 대중적이진 않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렇기 때문에, 혹여 다루게 된다면 ‘예의를 잃지 않고, 하지만 대중적으로도 부디 잘 되었으면 하는’ 소재를 다룬 이 작품이 상당한 성과를 낸 것 같아서, 그게 너무 반갑고 좋았던 것 같아요.





- 영화 볼 땐 원래 좋아하던 배우들을 보는 게 참 좋았었는데요. 오늘은 진주댁(슈퍼) 역할하신 분이 아른아른하네요. 염혜란 배우님.

    • 보고 와서 다시 읽을게요~ :)

    • 우와 섬세하시네요

      글을 잘 쓰신건가? 잘 읽었습니다
      • 별별 생각을 글자로 굳이 옮겨놔서 거슬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좋게 읽혔다면 다행입니다~
    • 저도 영화 보고 나서 다시 읽겠습니다^^
    • 두 주연배우 못지 않게 염혜란 배우분의 연기가 굉장했습니다. 그런 눈빛을 하시다니...

      • 아이캔스피크의 캐릭터 비중의 역할이 많았다면 이전부터 주목받고 팬들도 늘었겠죠. 이럴 때 재발견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씁쓸합니다. 그런역할을 언제 줬어야지... 아이캔스피크 같은 영화가 좀 더 많았으면 하네요.
    • 영화 보고 와서 읽어보겠습니다

    • 이렇게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나문희 배우에 대한 부분에서 소름 돋았습니다. 와.......


      진심 궁금하고 조언을 구하고 싶은데 이렇게 섬세하게 생각하고 표현하려면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 염혜란 배우님이 도깨비에서 지은탁의 이모 역할을 하신 분이었군요. 완전 다른 사람 같아요

    • 옥분님과 진주댁의 모멘트에서 그냥 무너졌어요. 그냥 모든 게 한없이 미안하고...
    • 예의를 잃지 않은. 정말이지 그렇습니다. 올해 본 영화 중 거의 최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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