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조소)
#.오래 전, 군대 문제가 도저히 해결되지 않던 시기에 먹으면 죽는다는 약을 구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 나는 그 약을 먹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이러겠죠. '쓸데없는 내용에 바이트를 낭비하네. 그걸 먹었다면 넌 이 글을 쓰고 있지도 못할거잖아. 안 써도 알아.'라고요.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예요. 내가 산 그 약이 정말 먹으면 죽는 약인지 아니면 그걸 판 녀석이 돈만 챙기고 안 죽는 약을 준건지는 말이죠. 애초에 그게 약인지 뭔지조차 확실하지 않아요.
어쨌든 나는 그걸 버리고 싶었지만 며칠 동안 그러지 못했어요. 이걸 버렸다가 온갖 우연이 겹치고 겹쳐 누군가가 섭취하게 되어서 죽는다면? 그럼 내 마음이 무척 아플 테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죽건 말건 전혀 신경쓰이지 않지만 내 마음이 아픈 건 잘 못 참거든요. '아무데나 버린다'는 선택은 없었어요. '없애버린다'를 선택해야 했죠.
그래서 그걸 가지고 나가서 어느 날은 거리를 서성이거나 어느 날은 괜히 한강 다리를 건너거나 했어요. 하지만 어딘가의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한강에 떨어뜨릴 수도 땅에 묻을 수도 없었어요.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태워서 없애는 걸 선택했어요. 그게 확실하게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약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죠.
요즘은 그 약을 그냥 계속 가지고 있으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하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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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어떤 사람들은 A는 계속 A고 B는 계속 B라고 하지만 글쎄요. 세상 일이란 건 농도와 밀도, 정도에 따라 완전히 성질이 바뀌어요. 예를 들어서 겸손과 자기비하는 비슷하지만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완전 다른 성질의 것이죠. 조금 짜증을 내는 것과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도 본질은 같지만 완전히 다른 감정표현으로 인식되는 것처럼요.
v라는 사람이 새로 연 가게에 갔어요. 나와 v 사이엔 복구불가능한 균열이 만들어져 있었지만...근처에서 볼일을 마치니 마침 비가 와서 그냥 비를 피한다는 핑계를 삼아 가 봤어요. v는 나를 보고 뜬금없이 존대말을 썼어요.
'은성씨 제가 당신에게 정말 죽을 죄를 지었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
2.죽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죽을 죄를 지었다고 굽신거려야 하는 괴물같은 상황이 너무 슬펐어요. 그래도 v는 v답게 10분 후 다시 반말 모드로 돌아갔고 자신의 직원들을 소개해 주겠다며 직원들을 불러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소개멘트가 너무 허황된 수준이었어요.
뭐...사실 그래요. 그런 소개멘트를 그냥 받아먹어도 괜찮을 거예요. 이런저런 곳에서 보는 다른 남자들은 돈을 훨씬 적게 쓰고도-물론 팀 단위를 다 합쳐서-이보다 훨씬 큰 허세를 떠니까요. 70을 100이라고 뻥치는 게 아니라 아예 없는 사실을 있다고 뻥을 치는 게 다반사예요. 그것도 자기들 입으로요.
그러니 v가 해주는 허세 소개멘트를 굳이 반박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어도 괜찮았을 거예요.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과장된 소개를 내버려두는 건 내 입으로 그렇게 떠드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v가 나를 소개하는 멘트를 칠 때마다 일일이 반박하다 보니 어째 자기비하가 되어버렸어요.
3. v가 나를 띄워주려는 시도를 계속 해 결국 짜증이 나서 외쳤어요.
'내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라면 이 따위로 살고 있지는 않겠지.'
라고요. 이 말을 하고 보니 그냥 '그렇지 않아.'라거나 '과장이야.'정도로만 말해도 괜찮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적극적으로 v의 말들을 반박하다 보니 자기비하를 심하게 한 것 같아서요.
v도 나를 띄워주는 걸 포기했는지 정색하고 시선을 아래로 깔았어요. 1초 후 다시 웃음을 되찾고 직원들에게 말했어요. '얘는 자기가 뭘 가졌는지도 모르는 애야.'라고요. 매우 가소로웠어요. v야말로 자신이 뭘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말하는 거니까요.
4.휴.
5.v는 '아, 그러고보니 네가 작년에 데려왔던 걔랑 연락했어.'라고 했어요. '작년에 걔'는 나를 시계도둑으로 몰아서 매우 짜증났던 사람이예요. 듀게에서 만났던 사람이죠.
그래서 '아직도 연락을 한단 말이야?'라고 약간...앙칼지게 말했어요. 표정 관리를 아예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내 얼굴을 보자 v는 상황파악이 된 듯 재빨리 태세전환을 했어요. 그 자와 사이가 안 좋은지 자기는 몰랐다고요. v는 카톡창을 켜서 눈앞에 들이대며 '이거 봐봐, 최근에 우연히 연락이 된 것 뿐이야. 이제 안하도록 할께.'라고 말했어요. 남의 카톡대화까지 보는 건 매우 찌질한 일 같아서 보지는 않았어요.
이젠 v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도 주제도 아니어서 날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말했어요. 그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서 신경 안썼지만 v에게는 물어보고 싶었어요. 내가 하룻밤 술값보다 싼 시계를 훔쳤을지, 아니면 안 훔쳤을지에 대해서요.
그야 이런 질문을 대놓고 하면 누구나 '넌 그럴 사람이 아냐.'라고 말하겠죠? 앞에 당사자가, 그것도 손님으로 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v의 표정을 보고 싶어서 물어봤어요.
6.이런저런 직원들 중에는 옛날 v의 가게에서 알았던 사람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 자와의 관계 또한 복구불가능이었어요. yj라고 해 두죠. yj는 이전에 주인공으로 한번 나왔어요. 잘 찾아보면 누군지 알 수 있어요.
매니저가 된 버전의 yj가 들어와 만나서 정말 반갑다고 했어요.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사실대로 말했어요. 너무 슬프다고요. 옆에 앉은 다른 직원이 뭐가 슬프냐고 물어와서 대답했어요.
'서로 좆같이 싫어하는 두 사람이 만났는데 한 쪽은 깎듯이 인사를 하고 있잖아. 난 이런 상황이 너무 슬프다고. 그러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
그러자 yj는 '나는 은성씨를 전혀 싫어하지 않아요. 그건 은성씨만의 착각이예요.'라고 말했어요. 그래요. 바로 이런 거짓말이 너무 슬펐어요. 거짓말 자체보다는, 내 주위가 온통 거짓말들로 채워져 있는 게 슬펐어요. 그래서 yj에게 앞으로는 인사할 필요 없다고 말했어요.
자신의 인생을 나아지게 해주지도 않을 사람에게 굳이 배꼽인사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게다가 싫어하기까지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요.
7.노래를 좀 불렀어요. 몇 곡 정도 부르자 v가 깔깔거렸어요. 반주를 연주하는 아저씨의 표정이 웃기다고요. 나는 아저씨를 등지고 있어서 안 보였지만, 거의 처음 보는 노래들을 따라가는 아저씨의 표정이 점점 괴로워졌다나 봐요.
반주를 연주하는 아저씨가 평소에 연주할 일 없는 곡들이라 너무 따라가기 힘들다고 한숨을 쉬어서 마지막엔 쉬운 곡을 불렀어요. 'love of my life'는 연주할 줄 아냐고 미리 확인했어요. 물어보면서도 '연주로 먹고 사는 사람에게 이건 좀 모욕적인 질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아저씨의 표정이 매우 밝아졌어요. 무언가에서 해방된 듯한 표정이었어요.
8.거기에는 v의 친구도 와 있었어요. 이쯤되면 여러분도 알겠죠.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복구불가능이라는 거요. 당연히 v의 친구와의 관계도 복구불가능이었어요. v의 친구는 자존심이 구름 위 어디쯤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대뜸 들어와서 한 잔 달라고 했어요. 한 잔 주고받은 후 '이 방에서 나가줘야겠는데. 우린 이제 적이니까.'라고 말하자 그녀는 '난 직원이 아냐. 나가라 마라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라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매우 논리적으로 대답해 줬어요. '네가 직원이 아니라면 더더욱 여기서 나가야지.'라고요.
결국 그곳에서는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틱틱대기만 하다가 왔어요. 아는 사람들을 보면 늘 짜증을 내게 되니까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왔어요.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미 또 갔다온 상태예요. 내일도 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고요...아 이미 오늘이군요.
9.그야 아직은 괜찮아요. 심술을 부리는 것만으론 누군가를 죽이거나 해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위에 썼듯이 본질이 같아도 밀도-농도-정도에 따라 성질은 달라져요. 가끔 내가 아닌 세상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곤 해요.
어떤 사람이, 심술이 분노가 되어버릴 때까지 살아 있는 게 세상에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말이죠. 어쩌면 그렇게 되기 전에 죽어주는 게 그와 세상 둘 다에게 좋은 일일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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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비에 젖었어요. 비가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낮에 나가면서 이상한 미신적인 자신감이 들었거든요. 내가 바깥에 나갈 때마다 타이밍 좋게 비가 그쳐 주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요...쳇.
이 시각까지 못 잤으니 아무래도 자면 안되겠죠. 빌어먹을 출근을 해야 해서요. 우리 모두는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거나, 할 수 없게 되는 날까지는 출근을 해야 하는 저주에 걸려버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