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를 읽으며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에 대해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 (상)>을 120페이지 정도 읽었어요. 한 남자아이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찾아가는 소설입니다. 


첫 스무 페이지 정도를 읽으며 번역자가 참 고생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소설의 공간적 배경도 낯설고, 수학과 과학에 관한 얘기들도 자주 나오고, 문장도 뭔가 쉽게 읽히지는 않았어요.


분석적이고 지적인 여주인공 캐릭터가 저에겐 꽤 매력적이었고 소설의 전개 과정도 그렇게 재미가 없진 않았은데 


이상하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범인이 누구인지 혹은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해도 


그 진실 자체가 저한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그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도 제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어낼 힘이 생기질 않죠. ^^)


그래서 잠시 한눈 팔며 그 이유를 생각해 봤어요. 


(저는 소설을 읽다가 진도가 잘 안 나가면 그 소설과 저와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합니다. ^^) 


<스밀라>를 읽으면서 저는 철저하게 관찰자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스밀라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저는 쉽게 예측할 수가 없었어요. 


그저 그녀가 알려주는 만큼 딱 그만큼만 알게 되고, 언제나 가라앉아 있는 그녀만큼이나 저도 가라앉아서 조금은 무력하게 


주인공이 밝히는 진실을 지켜봐야 하죠. 


그런데 지난 주에 읽었던 <죄와 벌>은 좀 달랐던 것 같아요. 처음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저는 라스콜니코프가 어떤 사람인지 


대번에 알았고 그의 자폐적이고 냉소적이며 분석적인 성격에 지대한 흥미를 느꼈고, 그의 초조와 불안과 긴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어요. 


더구나 몇 페이지 안 되어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현장까지 생생하게 목격하게 되었고요. (이 부분 정말 짜릿짜릿했죠. >.<) 


한 사람의 성격에 대해,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치명적인 진실까지 다 알아버리면 그를 버리고 떠나기가 쉽지 않아요. ^^


어떤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독자에게 권력을 줬던 것 같아요. 작가가 아는 만큼이나 독자 역시 등장인물에 대해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으아아 저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걱정하고 참견할 권리...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죄와 벌>은 서스펜스이고 <스밀라>는 미스터리인가... 나는 미스터리를 즐기는 차분하고 인내심 있는 


관찰자보다는 서스펜스를 즐기는, 다 아는 권력자, 열광적인 참견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서스펜스는 먼저 진실을 알려준 다음, 그 상황 속 인간의 심리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미스터리는 진실 그 자체를 찾아나가는 데 


집중한다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저는 언제나 진실/사실 그 자체보다는 진실에 대면한 사람들의 심리적 반응과 그 후의 행동에 


더 관심이 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스밀라>를 끝까지 못 읽은 이유는, 아마 제가 humanity/인류애로 충만한 사람,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며 열정을 분출하고 


싶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거라고 정리하며 ^^ <스밀라>를 다 읽은 분은 차분하고 냉정하고 인내심이 있는 분일 거라고 결론냈습니다. ^^


그렇지만 인내심이 필요한 미스터리보다는 관객에게 권력을 주는 서스펜스가 대중들에게 훨씬 인기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역시 저는 대중적인 취향인가 하는 자괴감이 몰려오기도 했죠. ^^ 


그러면서 강연이나 강의를 서스펜스 형식으로 몰입감 있게 할 수는 없을까, 청중이 강연자를 묵묵히 따라오며 정답을 받아들여야 하는 


강연/강의가 아니라, 정답을 혹은 정답일 수도 있는 결론들을 먼저 알려주고 청중이 적극적으로 참견하게 만드는 그런 강연/강의를 


할 수는 없을까... 뭐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 


그러다가 카프카의 <소송>으로 넘어갔죠. <스밀라>는 두 권이고 <소송>은 한 권이니까 (책 분량도 절반이니까) <소송>이라도 다 읽고


듀게에 독후감을 써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읽기 시작했어요. ^^ 한편으론 <소송>은 미스터리인가, 서스펜스인가 하는 궁금증도 있었고요. 


K가 체포되는 걸로 시작된다는 점에서는 서스펜스적인 요소도 있는 것 같은데 그가 왜 체포되는지 이유도 모르고 소송을 하게 된다는 


줄거리를 보면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좀 더 많을 것 같았어요. 결론은 모르겠어요. ㅠㅠ 100페이지 정도밖에 못 읽어서... orz 


뭔가 비현실적인 얘기들이 초반부터 계속 나오니 집중도 안 되고 해서 에라 영화라도 보고 줄거리를 몸에 익힌 후 소설을 읽자 하고 

 

오손 웰스가 감독하고 앤소니 퍼킨스가 주연한 Trial(1962)을 찾아 보기 시작했는데 침대에 누워서 보니 첫 소송 때부터 그만 졸고 말았어요. ;;TOT;;


그래서 이번 독후감은 소설도 둘 다 못 읽고 소설을 대신할 영화조차 다 보지 못했다는 처절한 실패의 고백입니다. ;;TOT;; 


부모님 따라 둘레길도 다니고, 요즘 며칠 동안 온가족의 세금 관련 일들을 제가 다 처리하다 보니 안 그래도 안 읽히는 책이 


완전 안 읽히더군요.


거기다 지난 해에 못 봤던 재미난 영화들도 챙겨봐야 하고 (<연애담>, <죽여주는 여자>,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다 봤어요. ^^) 


각국의 피겨 스케이팅 내셔널도 찾아봐야 하는데다 호주 오픈 테니스도 시작했고... 아, 세상은 넓고 놀 거리는 너무 많아요. ㅠㅠ 


노는 와중에도 특검은 잘 되고 있나 수시로 체크해 줘야 하고..


책을 읽으려면 아무래도 놀 거리, 일거리가 없는 무인도로 가야 되겠습니다.  


참고로 오늘 채널CGV에서 10시 30분에 <엑스마키나> 방송합니다. (평론가의 해설을 듣지 않으려면 10시 40분에 켜면 돼요.) 


모레 25일 (수) 밤 10시 30분에는 채널CGV에서 <버드맨>을 방송하고요. 


27일 (금) 오전 10시에는 SBS에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방송합니다. 


28일 (토) 밤 10시 40분에는 TVN에서  <검은 사제들> 한다더군요. 저는 이 영화 아직 못 봐서 이번에 보려고요. 

 

29일(일) 밤 11시 40분에는 KBS1에서 <Sing Street> 방송해요!!! 올해 개봉 영화인데 빠르네요. 재밌게 봤던 영화인데 놓친 분은 보시길...


듀게에 <겨울 왕국> 못 보신 분은 안 계시겠죠?? ^^ 30일 (월) 10시 40분에 채널CGV에서 방송하는데 저는 이번에 보려고요. 


호주 오픈 테니스 8강에 페더러가 진출해서 만약 결승까지 간다면 열심히 응원해야 돼서 책 읽기는 틀렸는데 ^^ 거기다 설 연휴도 있고 


다음 주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어머니께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모래그릇 1, 2>를 아주 재밌게 읽으시는 걸 보니 재밌을 것 같긴 한데... 


그래서 이번에 못 읽은 건 그냥 놔 두고 <모래그릇>으로 건너뛸까 합니다. 아니면 서머싯 몸의 <면도날>을 읽든지... 


요즘 독서 의지가 박약해져서 장담은 못하겠는데 혹시 다음 주에 독후감이 안 올라오면 못 읽은 걸로 생각하시고 저 대신 책 열심히 읽어주세요. ^^ 


    • 소설속에서 나를 보거나 나와 전혀 아무것도 닮지 않는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 진도가 잘 나갈거 같네요.


      엑스마키나가 좋고 게시판 회원중에 겨울 왕국 못보신 분 열에 한명은 있다에 걸겠습니다,풀베팅 하겠어요.

      • 저와 전혀 닮지 않은 주인공이 나온 소설을 재밌게 읽은 게 있나 생각해 봤는데 기억에 없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미스터리라도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등장인물의 심리적 고통/고뇌를 느낄 수 있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아... 저는 가학적 성격의 인간이었던 걸까요... ^^)  



    • 미스터리는 일어난 일을 다루고 (이야기하신 서스펜스랑은 조금 차이가 있지만) 스릴러는 일어날 일을 다룬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비슷하게 미스터리는 읽다가 지난 장을 들춰 확인하게 되지만 스릴러는 얼른 뒷얘기를 읽고 싶어지고요. 역사서 읽다가 점집에도 가 보고 싶고 그런 것일까요...
      • 사실 서스펜스는 하나의 장르라기보다는 불확실한 상태에서 독자/관객이 불안과 긴장을 느끼게 하는 '기법'을 총칭하는 것 같아요. 미스터리는 어떤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내용'을 갖는 걸 총칭하는 것 같고요. 그래서 본문에서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로 나눈 것이 그리 정확한 구분 같지는 않아요. ^^ (미스터리도 서스펜스를 느끼게 만들 수 있을 테니). 제가 미스터리 소설은 거의 읽어보지 않아서 (어릴 때 읽은 괴도 뤼팽, 셜록 홈즈 추리집 정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밝혀진 증거/사실에 기반해 논리적 추론을 하며 나아가는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경우 말씀하신 대로 '일어난 일'을 다루는 것 같아요. 스릴러는 짜릿짜릿 전율을 느끼게 하는 걸 총칭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Thriller로 검색해 보니 마이클 잭슨 노래만 나오네요. ^^ 짜릿짜릿해지는 건 아무래도 흥분, 긴장, 공포 상태에서 일어날 것 같으니 (이미 알고 있는) 과거의 일로 짜릿해지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래서 스릴러는 말씀하신 대로 대부분 '일어날 일'과 관련될 것 같아요. 그런데 일어난 일을 조사하다가 모르던 과거의 (무서운) 일을 발견할 것 같은 예감에 짜릿짜릿해진다면 미스터리 스릴러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독자/관객이 뭔가를 더 알고 주인공이 어떻게 할지 지켜보다 불안과 긴장을 느끼며 짜릿짜릿해지면 서스펜스 스릴러가 될 것 같고요. 주인공이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독자가 주인공보다 뭔가를 더 알고 불안과 긴장을 느끼다가 짜릿짜릿해지면 미스터리 서스펜스 스릴러가 될 것 같고... ^^ 저는 서스펜스 기법을 좀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 영화 '스밀라'는 후반부를 액션으로 해결해서 '이게 뭐야' 싶으면서도 저는 낄낄거리며 잘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 초반부에서 주인공의 조용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생각하면 후반부에서 액션으로 해결한다는 게 상상이 안 가기는 하는데 주인공의 어머니가 한 액션 하셨던 분인 것 같으니 주인공에게도 잠재된 액션 본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 어쨌든 skelington 님은 차분하고 냉정한 관찰자 타입이신 걸로 제 맘대로 결정 ^^  

    • 저는 스밀라 앞부분은 좋았는데 뒷부분은 너무 재미가 없어서 고통스러웠습니다. 두 번이나 읽었는데 어떻게 끝났는지 뒷부분이 기억이 안 나네요.

      • 뒷부분이 재미가 없다고 하시니 못 읽은 게 덜 후회돼서 좋네요. ^^ 저도 앞부분이 꽤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저는 주인공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인간 심리 저 밑바닥에 뭐가 꿈틀거리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 이 소설이 그런 목적에 부합하는 소설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죠. 물론 제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고요. ^^ 

    • 스밀라에 대한 해석이

      저랑은 거의 정반대로 달라서 재밌네요.


      스밀라는 그 어떤 집단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소수자이고 마음 속에 분노와 애정을 간직한 뜨거운 인간으로 읽어냈고 그래서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가슴속에 화로를 품고 있죠. 그 화로가 각자를 움직이는 동력이 돼요.


      첫 읽기는 고통스럽도록 더뎠지만 되풀이 읽을 때마다 온도가 올라가는 책입니다.


      여유를 두시고 끝까지 읽어보셔도 좋을 듯
      • 지적이긴 하지만 조용하진 않아요

        입도 걸고 물리적 폭력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죠 아주 어렸을 때부터요
        • 읽으면서 점점 온도가 올라가는 책이었군요. ^^ 그린란드 원주민에 대한 뭔가 은폐된 비리 같은 게 죽음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저는 사회 문제도 뭔가 인간의 고통과 연결이 되어야 관심이 생기는 사람 같아요. '이런 구조적인 문제로 이렇게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급작스럽게 정의감이 불타오르죠. ^^ <스밀라> 초반엔 그런 고통을 별로 못 느껴서... 그런데 스밀라가 가슴 속에 뜨거운 게 있는 사람이었군요. 초반 분위기를 생각하면 입도 걸고 물리적 폭력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좀 놀라워요. 책을 읽기 전에 이런 약간의 정보를 갖고 읽기 시작하는 것도 독자가 색다른 기대를 가질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아요. 

    • 스밀라는 추리적인 면에서 보면 무지 심심하고 김빠지는 소설이지만


      스밀라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매력적인 소설이었고, 또 아빠였나요?


      아빠와의 관계도 흥미로운 소설이었던 기억이 있네요.


      사실 읽은지 너무 오래돼서 어렴풋이 느낌만 간신히 남아있습니다.

      • 저는 지적이고 냉철한 여성 캐릭터를 몹시 좋아해서 스밀라 캐릭터에도 꽤 매력을 느꼈는데 


        소설의 흐름이 좀 느리긴 했어요. 스밀라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인 것 같았는데...


        역시 듀게에는 <스밀라>를 끝까지 읽은 차분하고 인내심 강한 관찰자형 독서가들이 많으시군요. ^^


        좀 전에 <모래그릇 1>을 읽기 시작했는데 재밌네요. 벌써 80페이지 읽었어요. (야호~) 


        오랜만에 진도가 술술 나가니 신나네요. (이 책 읽는 건 성공할 듯 ^^) 


        의도하진 않았는데 이번에 읽어보는 책들은 대부분 범죄와 관련돼서 신기해요. 


        죄와 벌, 스밀라, 소송(이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몰라 헤매는 거지만), 모래그릇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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