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운 위대함-<지하철에서1>*

  제 출근길 주요 교통수단인 오전 8시의 도봉산행 7호선은 (아는 세대만 아는) 뉴키즈온더블록(New kids on the block) 콘서트 압사 사고의 2010년판 재현이 아닐까 하는 공포를 종종 불러일으킵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저는 머리와 몸통과 손과 다리와 발이 가방과 제각각 다른 위치에 놓이는 진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한 정거장 멈출 때마다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환승역에 다다를 때까지는 아비규환이었죠. 겨우 숨 좀 돌릴만 한가 했더니 환승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이 대거 들어차면서 다시 지옥을 방불케 하는 밀도에 저는 질식할 것 같았어요. 키스하기 직전의 연인처럼 달라붙어 타인의 입냄새를 맡고 머릿내를 맡고, 더불어 내 땀구멍의 파우더를 노출시키고도 멀쩡하게 딴전을 피워야 하는 이 괴로운 밀착감이라니.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입에서 씨팔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았죠. 모두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시간에 다 같이 지옥을 체험하고 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다반사로 겪는 새로울 것도 없는 출퇴근 살풍경. 그저 내려야 할 역에 무사히 내려 지각하지 않으면 다행인 거고, 무너질 것 같은 숙취와 피로를 감당하는 두 다리를 버티다 누군가 먼저 내려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으면 그날은 운수 좋은 날인 거죠.

 

   겨울이 와서 그런가 전기장판과 합체가 된 듯한 몸을 분리해내기가 쉽지 않은 요즘, 독립적인 경제력 내지는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위해 밥벌이를 나가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나 하는 말이겠고, 진짜 다 싫고 귀찮습니다. 이십대에 시작한 직장 생활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를 버티게 했던 건 ‘해가 뜨면 어디든 기어 나가야 한다. 그게 성숙한 사람의 자세다.’ 라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조로증이었어요. 스스로를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직감적으로 받아들였던 순간부터 한 번도 놀아본 적이 없었지요.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옮길 때 제대로 쉬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주제와 수준에 맞는 일을 하고 일한 만큼 못 미치는 돈을 받고 월급의 몇 배에 가까운 인격적인 모멸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며.

 

  머릿속에선 늘 눈부신 화이트셔츠를 딱 맞아 떨어지는 펜슬스커트에 받쳐 입고 똑부러지는 발음으로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을 해내는 탤런트의 발연기 같은 망상. 고소득 연봉에 고상하고 고급한 취미를 갖고 몸관리 인간관리 너무 엄격하여 노는 물이 다른 차가운 도시 여피족이 되는 망상을 하면서, 백화점 명품관을 기웃거리며 80% 염가에 나온 하급 명품이라도 하나 사들이면 이것이 바로 천민자본주의의 노예로 사는 즐거움이 아닌가 자족하던 나날들. 기실 회사에선 그저 미쓰* 으로 불리며 커피심부름을 하고 허드렛일을 하며 퇴근 후에 한참 생각해보면 너무나 기분 더러운 성추행적인 발언들을 뒤늦게 곱씹으며 열받아 했다가 그런 인간이 주도하는 회식자리에서 상사들에게 술을 따르며 ‘여직원들 많이 먹어라’ 소리를 들으면 황송해 하는 거지근성에 괴로워 가슴을 치던 나날들. 그렇게 악순환 반복, 연봉 3천만 원 이상을 받는 사람들은 대체 어느 행성에 사는 외계인인가요?

 

  내게 있어 직장은, 늘 그런 것. 칙칙하고 황량한 회색도시 같던 그 **단지를 벗어나 보름간의 어정쩡한 휴지기 끝에 기어들었던 서소문 어느 곳. 대한민국의 경제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는 S사의 본사에서 쏟아져 나온 유백색 얼굴을 한 넥타이부대와, 하나같이 아나운서 머리 모양을 하고 무채색의 정장을 입은 야무진 입매의 여자아이들이 회사의 출퇴근카드 목걸이를 보란 듯이 걸고 나와 새로 나온 신상에 관한 얘기를 재테크와 함께 화제 삼을 때, 그이들의 에트로 머리띠를 힐끗거리던 심정으로, 그 매끈하고 단순해 뵈는 라이프스타일에 기죽고 열등감 느끼며 안절부절 하던 그런 것이죠.

 

  그럼에도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 숨을 헐떡이며 뛰어드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이자 활력이라고 믿으며, 그 숨가쁨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은 참된 인생을 알지 못한다는 편협한 믿음 하나로 만원 지하철에 몸을 우겨넣던 기억에 대해 시절이 아무것도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요즘 같은 세상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잉여의 나를 필요로 하는 어딘가에 엉덩이 붙이고 일하는 것만으로 그게 어디인가 자족하며 살려던 저는… 새해부터 백수가 될 지도 모를 결단을 어제, 내렸습니다. 그러나 소비 위주의 경제활동이 병적인 저는 곧 어딘가로 또 기어나가 돈을 벌려고 들지도 모르겠는데, 제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 직장이 아닌 직업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앞으로 펼쳐질 보릿고개에 대한 각오로 이 정도는 감수하리라 아직은 큰소리 쳐봅니다.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최영미 <지하철에서1>---내겐 언제 읽어도 불쾌한 시

    • 몇몇 구절이 가슴을 에이게 하네요.
      조만간 '성숙한 인간의 자세로 돌아가' 순대 속으로 자발적으로 기어들어가렵니다.
      너무 제대로 쉬었어요. 비자발적이지만 공백이 생각보다 길어지니 무엇을 향한 것인지 모를 (아니 주위 사람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죄책감이 들어서 그게 제일 힘드네요.
    • 굉장한 필력이다, 시를 써보시는게 어떻겠냐고 댓글을 달려고 했는데 시가 맞았군요 ^^;;
    • 그지같은 직장만 전전하셨다는 게 의아할 정도로 놀라운 필력이십니다. 다른 거 하시면 안되나요...
    • 글 정말 잘 쓰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힘내세요. 힘냅시다.

      wendy/ 시는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이죠.
    • 출근시각 신도림역에서 1호선에서 2호선 갈아타러 가다가 인파가 하도 몰려 몸이 찡기다 못해 다리가 허공에 둥둥 뜬 채 이동된 적 있어요. 무서웠지요.
    • 말리아님 너무 웃겨요 ㅋㅋㅋㅋㅋ
    • 그토록 징그러운 나날 속에서 이렇게 유려한 글이 나온다는 것은, 지독하게 아이러니하죠? 쿠델카 님의 글을 참 좋아하는 1인으로서, 여유롭게 산들대는 나날을 보내시게 되면 이런 '종류'의 글은 써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제넘은 아쉬움도 가져 봅니다. 잘 읽었어요.

      ps 저도 최영미의 저 시는 왠지 빈정상하였더랬습니다. 흥. 저도 정떨어지는 **단지에 근무했던 처지라서요.
    •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 직장이 아닌 직업의 문제라는 것---을 꽤 예전에 깨닫고도
      월급의 단맛과 밥벌이`는' 한다는 알량한 허영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는 1인이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 쿠델카님의 글을 좋아하는 1인 여기도 있다고 (이 기회에) 손 들어봅니다.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읽었어요
    • 와, 자신의 얘기를,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서술해나갈수있다니. 저 역시 감탄.
      감탄할수 없는 삶에서 감탄할수있는 글이 나오다니 유니스님 말대로 아이러니. 그리고 글 자체가 희망의 아이러니.
      지난 글과 연결되어서 더욱 슬프게 만드는 점이 있어요. 저런 지긋지긋한 삶을 계속할수있게 하는 동력이
      친구들과의 관계이기도 할테니,

      흠, 라디오 작가가 좋겠어(궁시렁)
      라디오작가들이 좋아하는 글 같아요.

      어떤 응원도 줄어가는 잔고를 늘여주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응원할께요. 좀더 자신있게 큰소리 치세요.
    • 저의 도플갱어인가요? (전 이렇게 글을 잘 쓰진 못하지만 7호선과 망상과 거지근성 및 기타등등은 저를 보는 것 같아요)
      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는 (사실은 카드사의 노예라서) 1인으로서 응원하고 싶네요
    • 밥벌이, 저도 지겹네요.
      최영미의 저 시는 그냥 눈물겹습니다.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8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1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30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8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8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3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