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 원, 라라 랜드, 너의 이름은

1월초 평소답지 않게 부지런을 좀 떨며 평일 동안 3일 연속 영화보기 도전을 해봤어요. 원래는 오늘 패신저스까지 4일 연속이 목표였지만, 패신저스의 평을 보니 패스해도 괜찮을 듯 싶더군요.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스타워즈 : 로그 원 


잘 알려진 시리즈의 프리퀄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결말이 정해져있고, 원작의 설정을 건드리진 않으면서도 뭔가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특히 스타워즈는 거의 신화화된 명성에 비해  세계관에 구멍이 많은 작품이고요. 에피소드 1~3은 이 헐거운 세계관에 프리퀄을 억지로 끼워맞추려다보니, 요다와 오비완을 공화국이 무너지고 다른 제다이가 학살당하는 그 시점에 싸워볼 생각도 안 하고 바로 20년 은신모드 들어가는 초겁쟁이로 만들어버렸죠...=_=; 로그 원도 이런 프리퀄의 틀에 갇힌 채 시작합니다. 올드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할 최종보스로 손색없는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줬던 데스 스타가 어떻게 그리도 허망하게 박살났는지를 그럴듯하게 설명해야 할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죠. 데스 스타의 허망한 최후는 설계결함 때문이며, 반군이 데스 스타의 설계도를 입수한 덕분이라는 것도 올드 3부작에서 언급된 내용이기 떄문에 이미 결말도 알려져있고요. 하지만 로그 원이 다행인 점은, 이들이 스타워즈 세계관의 주변인물이란 점입니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데스 스타의 설계도를 입수하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한 문장 뿐이거든요. 결말은 이미 예정되었더라도, 그들이 누구였고 또 어떻게 이 불가능한 미션을 성공시켰는지에 대해서 마음껏 뻗어나갈 여지가 있는 거죠. 그리고 여기에서 로그 원은 새로운 스타워즈의 세계를 엽니다. 


영화 초반 자신에게 중요한 정보를 준 정보원을 쏴버리고 혼자 도망치는 카시안의 모습은 이 세계가 우리가 알던 스타워즈와는 다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로그 원의 주인공들은 제다이가 아니에요. 제국군과 반군을 모두 싫어하는 도망자, 반군의 '대의'를 위해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지만 회의를 느끼는 스파이, 재프로그램된 제국군 드로이드, 귀순한 제국군 파일럿, 신전을 잃은 신전 수호자들이죠. 이들은 특별히 강하지도, 완벽하지도, 고결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도하려는 작전은 성공할 확률이 희박하고, 성공한다고 해도 생존 확률은 더욱 희박한 자살행위고요. 주인공 각성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절대 중요인물이 죽지 않는 스타워즈 본편의 세계관과 달리, 로그 원의 세계는 전투 중 그 누구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적이고 어두운 세계입니다. 스타워즈 세계관에 처음으로 죽음의 무게를 드리웠다는 것만으로 로그 원은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로그원의 또다른 장점이라면, 등장인물 & (특히)메카닉들이 할일을 한다는 겁니다. 주인공들은 똥고집에 의한 민폐나 연애질 따위 없이 임무에 충실하고, 병사들은 열심히 싸우고, 스톰 트루퍼도 허공에 레이저 날리는 대신 정말로 싸웁니다. 이워크의 무려 투석기 & 밧줄로 다리걸기에 박살나던 AT-AT 워커는 보병들의 개인화기로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위용을 내뿜고, 군용 드로이드 K2SO는 시니컬한 독설을 날려대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할일을 묵묵히 수행합니다. 덕분에 로그 원은 소꿉장난이 아닌, 정말로 전투같은 전투를 보여주며 특히 스타워즈 메카닉 덕후라면 숨을 들이킬 장면들을 만들어내요. 특히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그분'은, 역사상 가장 카리스마 있는 악역으로 꼽히면서도 정작 작중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목조르기 밖에 기억나지 않던 안습한 모습에서 벗어나 시스가 왜 공포의 대상인지를 제대로 보여줍니다. 인물들이 낭비되지 않고 할일을 한다는 건 이렇게 굉장한 일이에요! 


물론 로그 원이 '현실적'이고 '어둡다'는 건 기존의 스타워즈 세계관에 비해서입니다. 피와 땀, 흙먼지와 포연이 가득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된다는 건 아니에요. 별들을 오가며 인물 한명 씩 소개하는 초반은 좀 덜컹대고, 시니컬하던 주인공 진이 갑자기 열렬한 대의의 편에 서는 과정은 스타워즈 고유의 아빠 컴플렉스 & 가족 드라마를 감안하더라도 뜬금없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그 원이 이루어낸 성과는 멋집니다. 스카이워커 가문의 막장 가족드라마 없이도, 제다이 없이도, 민폐 캐릭터 없이도 스타워즈가 굴러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줬고, 스타워즈의 세계관이 어둡게 재해석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으니까요. 


* p.s. 로그 원을 보는 동안 헤일로 : 리치가 많이 생각났어요. 이미 비극적인 결말이 예정된 이야기(마지막 장면이 곧바로 에피소드 4와 연결되는 로그 원과 마찬가지로, 리치행성의 함락 & 필라 오브 아톰의 탈출장면이 헤일로 1편의 시작과 연결됩니다.)지만, 강력한 스파르탄-II이자 완전무결한 영웅인 프랜차이즈의 주인공 마스터 치프 대신 아웃사이더에 가까운 노블팀을 통해 헤일로 프랜차이즈 사상 가장 처절하고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전해주죠. 


2. 라라 랜드 


정말로 환상적입니다. 물론 그 시대를 전혀 접해보지 못했고, 제가 그다지 고전영화를 즐겨보는 시네마 키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에겐 헐리우드 황금시대와 당시 뮤지컬 영화에 대한 어렴풋한 환상 같은 게 있어요. 왠지 모든 것이 낭만적일 것 같은... 그리고 라라 랜드는 바로 저의 그 지점을 정확히 찌르더군요. 라이언 고슬링이 얼마나 멋진 배우인지, 엠마 스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서로 튕기면서도 아슬아슬한 썸의 분위기가 흐르는 탭댄스 장면이나,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천문대 데이트 & 댄스 장면은 최근 본 가장 로맨틱한 장면 중 하나였어요. 그리고 가장 후반부의 에필로그 장면 - 어쩌면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하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던 둘의 모습은 이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정말로 낭만적인 영화에요. 어쩌면 마지막의 그 쌉쌀함 때문에 더욱 달콤함이 배가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J.K. 시몬스의 출연은 감독이 건네는 농담입니다. '위플래시'에서 새로운 재즈 전설을 탄생시키기 위해 주인공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던 교수님이, '라라 랜드'에서는 '난 프리재즈 질색이니 셋리스트대로만 연주해'라며 무려 '징글벨'을 제시하는 레스토랑 사장님으로 출연... 


3. 너의 이름은 


예쁜 애니메이션입니다. 특히 배경 & 광원 장인 신카이 마코토답게 거의 모든 배경장면들이 바탕화면으로 써도 예쁘겠다싶을 정도에요. 일상의 소소한 모습과 거리의 풍경을 그토록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그가 최고라고 생각해요.하지만 그에 비해 이야기는 조금 아쉽습니다. 중간중간 노래가 너무 자주 나오다보니 거대한 뮤직비디오 클립을 보는듯한 느낌도 들고요. 전작들에 비해 분명 유머도 있고, 좀 더 이야기도 있는데 뭔가 가슴을 후려치는 한방이 없습니다. 전전작인 '초속 5cm'에서 2번째 에피소드 위성 발사장면에서는 정말 이제까지의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을만큼, 하려던 고백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주인공들처럼 저역시 입을 벌린 채 그 장면의 아름다움 자체에 매료되었고, 전작인 '언어의 정원'에서 비가 오는 장면도 정말 매력적이었는데 뭔가 '너의 이름은'에선 그게 안느껴졌어요. 아무래도 저에게 신카이 마코토의 마법은 뭔가 이뤄질 수 없는 안타까운 분위기와 만날 때 위력이 배가되나봐요. 


* 언젠가 쿄애니 인물작화 & 신카이 마코토 배경의 콜라보레이션을 보고 싶다는 망상이 들었습니다. 정말 예쁜 작화의 끝판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 셋 다 보게 될듯 합니다 자세히 쓰셨어요.라라랜드는 시대배경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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