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반골)
#.이상할 정도로 통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과 통화를 하면 문자로 8초정도에 끝낼 수 있는 대화가 30분이 넘어가는 거죠.
보통 어느날의 이야기 시리즈는 꽤 오래 된 일들인데...이건 일주일도 안된 얘기네요.
1.어떤 대장급 사장에게 괜찮은 가게가 있으면 좀 소개시켜 달라고 했어요. 가게가 뭐냐면...당연히 바죠. 삼각김밥이 맛있는 편의점이나 나초를 잘 하는 타코벨 지점을 추천해 달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한데 내가 발품을 팔거나 탐지능력을 발휘해서 찾아낼 수 있는 가게는 이미 다 찾아낸 뒤여서 말이죠. 이젠 업계 사람들의 추천밖에 안 남았어요. 사장은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어요. 카톡추가를 해 보니 프로필사진이 뭔가 눈에 익었지만 그냥 말을 터 봤어요.
그리고 이런...! 그 사람은 대장 사장의 졸개-이하L- 중 한명이었던 거예요. 대장 사장에게 '좋은 가게를 소개시켜 달라고 했잖아! 네 졸개의 가게가 아니라.'라고 하려다가...참았어요.
2.어쨌든 L도 위에 말한, 강박적으로 통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어요. 그래서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통화를 했어요. L은 강남의 어딘가에서 새로 일을 시작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뭐...L과 연락이 닿은 이상 L이 일하는 가게에 한번쯤 가주지 않는 건 박정한 일이잖아요. 나는 좋은 사람이니까요. 실제로 좋은 사람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얼굴도 보고 동료직원들과 사장에게 L의 가오도 한번 세워 줄 겸 가기로 했어요.
'왜 굳이 그러는 거지?'라고 물을 수도 있겠네요. 인심을 베풀어두면 어디서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거거든요. 그야 나는 야비하고 비열한 사람이라서 누군가에게 인심을 베풀 때는 절대로 그냥 인심을 베풀지는 않아요. 정확히 말하면 인심을 베푼다기보다는 '인심을 베푸는 것을 전시하는'거죠.
오른손이 한 일을 모두가 알게 하라가 내 모토거든요. 물론 내 스스로 퍼뜨리는 게 아니라, 나는 숨기려고 했지만 어쩌다 보니 인심을 베푼 사실이 유출되어 버린 것처럼 상황을 조작하는 것도 잊지 않아요. 나불대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아야만 하니까요.
'이런 건 알려지면 좋지 않을 텐데 왜 이런 게시판에 쓰는 거지?'라고 묻는다면...그야 여러분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실제로 그 버전의 나를 만날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여기에서는 누가 당나귀 귀를 가졌는지 외칠 수 있는 거죠.
3.그런데 L이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 줬어요. 일단 나이를 속이고 일하고 있는 중이니 말을 맞춰 달라고요. 그래서 알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알게 된 루트는 술집이 아니라 L이 운영하던 브런치카페로 설정해 달라고 부탁해 왔어요. L이 운영하던 브런치카페라는 게 정말로 존재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알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L이 기분이 좋아진 듯 말했어요.
'알았어. 나는 은성씨를 사장에게 펀드매니저라고 소개해 줄께.'
그래서 그럴 필요 없이 그냥 백수로 소개하면 된다고 하자...L은 그럴 순 없다고, 펀드매니저로 소개할 거라고 마구 우겼어요. 생각해 보니 나를 펀드매니저라고 소개하는 건 8% 정도는 진실이라서 그냥 그러라고 했어요.
그랬다가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어요. 나는 어딜 가도 누군가의 보증이나 소개가 필요 없거든요. 그게 필요할 정도의 장소라면 애초에 가고 싶지도 않아요.
4.휴.
5.그래서 L에게 그냥 주소를 가르쳐 주면 알아서 가겠다고 했어요. L은 이곳은 회원제여서 자신의 소개를 통하지 않고는 오지 못하니까 그냥 자신에게 맞춰 달라고 했어요.
더 기분이 나빠졌어요. 회원제라고 하는 건방짐에 대해서요. 그래서 말했어요. '일단 혼자서 가 보고 뜨내기 손님이라고 쫓아내면 그냥 돌아갈께.'
L은 극구 말렸어요. '아냐 그러지 마. 내가 사장님에게 은성씨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소개해 주고 싶어.'뭐 이런 말로요. 그야 L이 그러는 건 나를 띄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L자신을 띄우기 위해서겠지만요. 이렇게 통화를 하고 나니 30분 이상이 지나가 있었어요.
6.그런 걸 정말 싫어하는 이유가 있어요. 나는 술집이든 옷가게든 소비자로서 간다면 그 사람이 쓰는 돈의 액수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믿거든요. 그 사람이 검사장이든, 아니면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든 어디의 잘나가는 의사든 별개의 요소를 언급하면서 목에 힘주는 건 정말 짜증나요. 가게에서 목에 힘을 주려면 일단 돈을 쓰고, 돈을 쓴만큼 목에 힘을 주면 되는 거잖아요.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다면 같이 온 사람의 입을 빌려서나 자신의 입으로 말할 필요 없이 '대단하게 보이고 싶은 만큼' 돈을 쓰면 되는 건데 태도나 말주변, 목청으로 자의식을 드러내는 녀석들은 정말 짜증나요. 그래서 그런 녀석들과 격리되기 위해 가능한 밀폐된 곳으로 가곤 하죠.
바꿔 말하면, '밀폐된 곳이 마련되지 않은'곳은 이제 안간다는 뜻이예요.
7.소개받은 곳으로 가 봤는데...별로 좋지 않았어요. 룸은 커녕 부스도 마련되어 있지 않고 하다못해 테이블간의 간격이 먼 것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일단 그냥 앉아봤어요. 이렇게 그냥 가 버리면 L의 면이 깎일 거니까요. L의 면이 깎이는 건 알 바가 아니지만 L의 면을 깎으면 L은 내 면을 깎을만한 말들을 하고 다닐 거거든요. 일단 앉아서 그냥 이곳을 떠날 수 있을만한 핑계거리를 찾아내 보기로 했어요.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없으면 하나 만들면 되는 거고요. 나는 작가잖아요.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만드는 건 자신이 있어요.
흠...그런데 사장이 커피를 내왔어요. 사장이 커피를 주며 '펀드매니저시라고요?'라고 말했어요. 나는 L을 째려봤지만 L이 제발 좀 맞춰 달라는 제스처를 취해서 한숨을 한 번 쉬고 '좋게 포장하면요.'라고 대답해 줬어요.
믹스커피였다면 마시지 않고 그냥 나가도 됐겠지만...그 커피는 직접 내린 커피였어요. 직접 내린 커피를 내온 이상 이걸 마시든, 마시지 않든 이제 이 가게에서 그냥은나갈 수가 없게 된 거죠. 내 기준에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메뉴판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8.메뉴판을 봤는데 '인심을 베푸는 것처럼 보일 만한'게 별로 없었어요. 비싼 순서대로 메뉴판 위에서부터 주문해 봤는데 '없어 그런거' '안 들여놨어' '그거 찾는 사람 한 번도 못 봤어'라는 대답만 계속 돌아왔어요. 왜 이렇게 구비해 놓은 게 없냐고 투덜거리자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장의 기분이 좀 상한 것 같았어요. L이 내게 속삭였어요. '여긴 대장이 하던 가게 같은 곳이 아니야.' 라고요. 그리고 은성씨가 몰라서 그렇지 강남에서 진짜 술마실 줄 아는 사람들은 국산 위스키를 마신다는 말도 안 되는 말도 덧붙였어요. 이게 무슨 소리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9.어쨌든 그래서 적당한 걸(국산) 시키고 사장과 술을 마셨어요. 사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이 술에 취하면 실수할지도 모르니 미리 양해해 달라고 했어요.
물론 저런 건 대체로 거짓말이예요. 성질부리고 싶은 상대에게 성질을 부리고 싶을 때 미리 핑계를 대는 것 뿐이죠. 그래서 이미 좋지 않게 보였나보다...하고 알았다고 했어요. 사장은 곧 술에 취했고(또는 취한 척한거거나) 성질부리는 대신 나를 쏘아보며 중얼거렸어요.
'야. 여기 대단한 분들 많이 오셔. 여기 무시하고 그럴 거면 너 같은 거 안 와도 돼.'
라고요. 여기서 굳이 뭐라고 하겠어요? 고개를 끄덕이고 알았다고 했어요. 원래는, 그곳에 다시는 가지 않을 셈이었는데 저 말 한 마디 때문에 다시 가게 됐어요. 물론 '대단한 분들 많이 오시는 곳'이라는 말은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꽤나 과장이더라도요. 그래도 사장의 그 말과 눈빛이 마음에 들었어요. 무언가 알 수 없는 반골심 무언가 알 수 없는 슬픔 무언가 알 수 없는 자존심 같은 게 느껴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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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그냥 그 사장이 예뻐서 그랬을지도요. 그 사장의 가게를 다시 찾아가고는 싶은데 얼굴이 예쁘다는 것보다는 좀더 있어보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찾다가 멋대로 내 뇌가...작가 버전의 뇌가 핑계거리를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어요. 나는 나 자신을 잘 알지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느 쪽이 맞는지는 실제로 알 수가 없는 거죠.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를 잘 알고있나요?
먹을 만한 국산 위스키라.. 골든 블루인가요? 그냥 한번 맞춰 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