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과 눈과 비와 술에 관한 시 몇 편
첫눈이 오고 날씨는 춥고 그래도 촛불은 켜지고 어느새 11월은 다 가고...
오랜만에 라디오나 들어볼까 하고 모 프로그램을 틀었더니 곽재구 시인의 '겨울의 춤'을 읽어주길래
갑자기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을 뒤지다가 마음에 드는 시 몇 편 발견해서 적어봅니다.
겨울의 춤
곽재구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텐을 걷어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
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낙엽 아래 작은 시냇물이 노래하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
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
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
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첫눈이 내리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열어 젖혀야겠다
죽은 새소리 뒹구는 벌판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초록빛 춤을 추어야겠다
새로운 시간의 시작
정현종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아라
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
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늘 똑같던 공간이
다른 움직임으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이색적인 선들과 색깔을 그으면서, 마침내
아직까지 없었던 시간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열고 있다!
그래 나는 찬탄하느니
저 바깥의 움직임 없이 어떻게
그걸 바라보는 일 없이 어떻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바라건대 나는 마음먹는 대로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 있으리니 · · ·
눈
이성복
1
눈이 온다 더욱 뚜렷해지는 마음의 수레 바퀴 자국
아이들은 찍힌 무우처럼 버려져 있고
전봇대는 크리스마스 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눈이 온다 산등성이 허름한 집들은 백기를 날리고
한 떼의 검은 새들, 집을 찾지 못한다
마음의 수레 바퀴 자국에서 들리는 수레 바퀴 소리
이제 같은 하늘 바깥을 떠돌고
망자들은 무덤 위로 얼굴을 든다
-- 치욕이여, 치욕이여 언제 너도 백기를 날리려나
2
그 겨울 눈은 허벅지까지 쌓였다
창을 열면 아, 하고 복면한 산들이 솟아 올랐다
잊혀진 조상들이 일렬로 걸어왔다
끊임없이 그들은 흰 피를 흘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온 몸에서 전깃줄이 울고, 얼음짱에
아가미를 부딪는 작은 물고기들이 보였다
3
희생자들은 곳곳에 쌓였다
나무 십자가가 너무 부족했다
잘못, 시체를 밟을 때마다 나는
가슴 속에 물고기를 그렸다
희생자들은 곳곳에 녹아 흘렀다
물고기 뼈가 공중에 떠올랐다
아-- 하고 누가 소리 질렀다
또 한 떼의 희생자들이 희생자들 위에 쓰러졌다
사슴 뿔을 단 치욕이 썰매를 끌고 달려갔다
아-- 하고 뒷산이 대답했다
홀로움
황동규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속삭이다가
이성복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더 조그만 사랑노래
황동규
아직 멎지 않은
몇 편의 바람.
저녁 한 끼에 내리는
젖은 눈, 혹은 채 내리지 않고
공중에서 녹아 한없이 달려오는
물방울, 그대 문득 손을 펼칠 때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
늦가을 빗소리
황동규
물방울 하나하나가 꽃에 잎에 인간의 몸에
그리고 저희끼리 몸 부딪쳐 만드는 소리 아닌,
땅 위에 뒹굴며 내는 소리 아닌,
서로 간격 두고 말없이 내려와
그냥 땅 위에 떨어져 잦아드는 저 빗소리.
그 소리 마냥 어두워 동공이 저절로 넓어진다.
나무들의 뿌리들이 보인다,
서로 얽히지 못하고
외로이 박혀 있는 뿌리도.
내 잘못한 일, 약게 산 일의
엉켜진 뿌리들도 보인다.
멧비둘기 한 마리가 푸덕이고 날아간다.
마음 바닥에 잦아드는 저 빗소리.
시간이 졸아드는 소리.
술 노래
정현종
물로 되어 있는 바다
물로 되어 있는 구름
물로 되어 있는 사랑
건너가는 젖은 목소리
건너오는 젖은 목소리
우리는 늘 안 보이는 것에 미쳐
병(病)을 따라가고 있었고
밤의 살을 만지며
물에 젖어 물에 젖어
물을 따라가고 있었고
눈에 불을 달고 떠돌게 하는
물의 향기
불을 달고 흐르는
원수인 물의 향기여
곽재구 정현종 시인 같이 그래야겠는데 마음도 반 밖에 없는데.
뭐, 안도현 시인 같은 천진난만함도 괜찮은 것 같아요. ^^
천진난만
안도현
눈이 내려오신다고
늙은 소나무 한 그루
팔 벌리고 밤새 눈 받다가
팔 하나 뚜둑, 부러졌다
이까짓 것쯤이야
눈이 내려오시는데, 뭘
이까짓 것쯤이야
아까 요 아래 시의 번역을 댓글로 달아주신 분, 왜 지우셨어요...
열심히 찾아보고 공부하고 있다고 대댓글 달러 왔는데 허무해요. ^^
저는 흰 눈 속에는 컬러풀한 새보다는 까만 새가 있는 게 멋지겠다 이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나서 orz
이 시에 대한 해석을 찾아봤어요. http://www.english.illinois.edu/maps/poets/s_z/stevens/blackbird.htm
좋은 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겨울의 춤 근사하네요 :-)
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봤어요.
겨울 시에 은근히 멋진 게 많은 것 같아요. ^^
겨울 들판을 거닐며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겨울 시를 읽다보니 추운 겨울이 그렇게 두렵진 않은 것 같아요. ^^
눈
황동규
오 눈이로군.
그리고 가만히 다닌 길이로군.
입김 뒤에 희고 고요한 아침
잠간 잠간의 고요한 부재
오 눈이로군.
어떤 돌아옴의 언저리
어떤 낮은 하늘의 빛
언저리와 빛을 가진 죽음이 되기 위하여
나는 꿈꾼다, 꿈꾼다, 눈빛 가까이
한 가리운 얼굴을,
한 차고 밝은 보행을.
다시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 한 편 ^^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이 시 좋아요. 다른 시들도 좋지만.
이 시가 마음에 드신다니 시 한 편 더~ ^^
동질(同質)
조은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 나 지금 입사시험 보러 가. 잘 보라고 해줘.
너의 그 말이 필요해.
모르는 사람이다
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
지하철 안에서 전화를 밧줄처럼 잡고 있는
추레한 젊은이가 보인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잡을 것이 없었고
잡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 긴장을 못 이겨
아무 데서나 잠이 들었다
망설이다 나는 답장을 쓴다
- 시험 잘 보세요, 행운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