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나폴레옹이 되는 건 아니군요.....

파비아의 반란, 젊은 시절의 나폴레옹, (이탈리아 원정 사령관 시절)
[네이버 지식백과] 나폴레옹 1세 [Napoleon I, Napoleon Bonaparte] - 혁명에 대한 배반, 제국에 대한 야망 (프랑스 왕가, 인문과교양)
이 시절인가 보군요.
그런데 진짜 아무나 나폴레옹이 되는건 아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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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rince de Talmont, por Léon Cogniet, 1826.oil on canvas, 218 × 140 cm (85.8 × 55.1 in) Collection musée d'art et d'histoire de Cholet
Antoine-Philippe de la Trémoille, prince de Talmont (27 septembre 1765, Paris - 27 janvier 1794, Laval)
탈몽 공작, 앙투안 필리프 드 라 트레무알리. 방데 반혁명군 지휘자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초상화는 사후 복고왕정기(나폴레옹 몰락 이후) 샤를 10세(처형된 루이 16세의 막내 동생) 재위 시기에 그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슨 아이돌처럼 그려놨...)
1796년의 본격적인 이탈리아 원정이 있기 전까지 나폴레옹은 짧지만 어려운 시기를 보냈었습니다. 그는 1793년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툴롱을 탈환하여 파리의 혁명정부에게 큰 인상을 준적이었죠.(툴롱은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이며 가장 중요한 군항이기도 합니다. 김혜린의 만화<테르미도르>의 배경이 툴롱에서 시작되죠. 그리고 뮤지컬 레미제라블도 툴롱 항구에서 첫 장면이 시작됩니다.) 당시의 혁명정부로서는 공화국 수호의 근간이 될 수 있는 유능한 군의 인재들을 선발해서 전장의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이 절체절명의 과업이기도 했었는데, 이 일을 가장 앞서서 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지방의 파견의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로베스피에르 의원의 동생인 오귀스탱이 있었죠. 유능한 군사 인재를 찾고 있던 오귀스탱에게 나폴레옹의 툴롱에서의 활약이 눈에 띈건 당연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군은 툴롱을 포위한 채 몇 달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공격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코르시카 출신의 무명의 포병장교가 마침내 그 일을 해냈던 것이죠. 나폴레옹은 훗날 자신의 툴롱 공략은 해군의 지원 없이는 꼼짝 못하는 영국 육군의 고질적인 약점을 이용한 것 뿐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실제 전투에서 그가 입은 부상은 상당한 것이어서 - 영국군과의 백병전을 치르는 와중에 총검이 그의 허벅지를 관통했... - 전투가 끝난 뒤 정작 승전 장수는 병영 침상에 누워 죽든지 아니면 불구가 되는건 아닌지 걱정하면서 쓰러져있는 딱한 신세였었습니다. 그 때 그를 찾아온 사람이 저 파견의원, 바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오귀스탱이었습니다. (혁명 당시, 형제가 모두 국회의원이 되어 국민공회에서 활약함) 이 둘은 이후 서로 훌륭한 공조자가 되어 나폴레옹은 실질적으로 그의 후원 아래 이탈리아 원정군 작전 수립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1794년 봄에는 이탈리아의 오네글리아 항구와 사오르지오 공격을 성공시키기도 해서 오귀스탱의 후원에 보답하기도 했죠.

Jean Le comte du Nouy, Le souper de Beaucaire, 1869, 캔버스에 유채, 76/110cm, 국립 Malmaison 성 소장
하지만 곧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같은해 7월에 터진 테르미도르 쿠데타 사건으로 파리의 혁명정부에 큰 변화가 있었고 이는 나폴레옹에게는 실로 재앙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후원자인 오귀스탱이 형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반동세력에게 처형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나폴레옹에 대한 신변의 위협으로까지 이어졌는데, 그는 니스에서 체포되어 2주간이나 수사를 받는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투옥된 채 조사를 받는 나폴레옹에게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파리에서는 이미 그의 후원자인 오귀스탱을 포함 국민공회 의원 22명이 처형됐고 숙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파리 코뮌(한국으로 치면 서울시 의회정도 되겠네요)까지 이어져서 벌써 파리시 의원 77명이 길로틴에서 비명횡사했다는 얘기였죠. 정치 보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반동파들이 파리를 포함 프랑스 전역에서 자코뱅(로베스피에르의 정치클럽) 당원들에 대한 테러를 저지르는 상황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준 나폴레옹의 친구들은 그에게 해외망명을 권유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누가 봐도 나폴레옹의 운은 여기서 꼼짝없이 끝날 상황.

그러나 나폴레옹은 상황을 믿고 한번 버텨보기로 합니다. 그가 기대를 거는 상황이라는 건 바로 니스에서 그를 체포한 국민공회 의원 중 하나가 같은 코르시카의 동향인이었던 샬리체티였거든요. 죽마고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사람이 직접 체포영장을 들고 니스에 나타났을 때는 정말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지만 은근히 따뜻하게 구는 그의 태도에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오면 너무 거칠게 대할 것 같아서 직접 영장을 들고 왔다는 샬리체티에게 나폴레옹은 결사적으로 자신은 '중앙의 정치와는 관련이 없고 순수한 군인'일 뿐이며, 그 동안 자신이 이룬 전공을 상기시키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숙청 작업이 나라를 지킬 훌륭한 군인을 무고하게 없애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길 - 나폴레옹 개인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긴 했습니다만 - 오귀스탱이 그에게 파리시 보안 사령관을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거절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이는 샬리체티도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같이 야심많은 군인에게는 파리의 중앙 정치무대에서 활약할 좋은 기회였지만 그는 이를 고심끝에 거절했었죠. 그는 훗날 파리에서 한창 진행됐던 공포정치에 환멸을 느껴 그 제의를 거절했다고 말했었지만 실은 이탈리아 원정군 직책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거절했던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진짜로 느꼈던 정치적 환멸은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 혁명정부는 고질적인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로베스피에르는 내우외환의 이 참담한 정국을 힘겹게 이끌어 가면서도 통제경제같은 강력한 정책만으로 경제난을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요? 없긴 왜 없습니까...나폴레옹이 보기에 이 경제난을 타개하는 데는 정복지 수탈만큼 손쉬운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때 프랑스 혁명군은 주변의 유럽 동맹국들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덴마크와 네덜란드 지역의 상당 부분을 점령한 상황이었습니다. 여기만 털어도 혁명정부의 경제난이 한 숨 돌릴텐데!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이상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정복자가 아니고, 주변국을 식민통치 하기 위해 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원칙만 내세울 뿐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생각하기엔 이건 너무 '이상주의'일 뿐이었습니다. 벌써 혁명정부의 노예해방 선언으로 프랑스의 금쪽같은 돈 줄이었던 아이티에서도 자금이 막히고 있는 상황인데, 대체 어쩔 셈이람?
그런 그에게 파리에서 더 기함할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국민공회 의원 중 하나이며 로베스피에르의 가장 강력한 동료들 중의 하나인 생 쥐스트가 발의한 방토즈 특별법이었습니다. 법안 내용이야 체포된 반혁명파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민중에게 무상배분한다는 일반적인 토지개혁안 이었습니다만, 두 가지가 나폴레옹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바로 '반혁명파'와 '무상분배'였죠. 대체 누가 반혁명파라는 얘기야? 이게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죠. 이미 상당한 부르주아들이 혁명의 더 이상의 진행에 반발하고 있다는 건 익히 알려진 바이고 생 쥐스트가 바로 이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상분배? 민중에게? 진짜 돌겠군....프랑스 인 절반이 하루하루 먹을 빵을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건 나폴레옹 본인도 잘 아는 일이긴 했습니다만 - 한 때 그도 그런 시절을 보낸적이 있고 - 어디 프랑스만 그런가? 유럽 전체가 그런 상황인데, 아니, 세상천지에 백성이 굶주리지 않는 세상이 어딨다고? 이 자코뱅들은 너무 순진해...아주 한심한 백면서생들이군...돈 줄이 없는 것도 아니고 힘겹게 얻은 정복지와 식민지를 포기하고 국민들끼리 싸움이나 붙이다니! 이건 막말로 부자에게 재산을 강탈해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준다는 무슨 중세적 의적들 마인드도 아니고...이런 작자들과는 진작에 인연을 끊어야지...
확실히 나폴레옹의 마지막 발언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샬리체티는 새로 국민공회를 장악한 테르미도르 파에게 나폴레옹에 대한 호의적인 보고서를 올렸고 이로써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의 잔당으로 몰려 숙청되는 운명만큼은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랫동안 나폴레옹을 괴롭히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는 무정하게도 은혜를 져버리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고, 자기같은 식민지 출신에게 같은 '프랑스 인'이라는 소속감을 심어준 혁명정부를 배신했다는 자괴감이 그를 오랫동안 짓눌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동안 대혁명의 이상과 공화국 건설에 대한 아낌없는 지지를 표명해 오던 바였습니다. -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고서라도 - 게다가 오귀스탱의 비참한 죽음은....무명의 나폴레옹을 알아보고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의 길까지 터준 사람이 오귀스탱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더할나위 없는 조력자의 상실과 이제는 오히려 살기 위해 그들을 비난하고 다녀야 한다는 현실이 더 할 수 없이 그를 괴롭게 했지만, 현실주의자 답게 이런 생각은 마음 한 구석에 묻어두자고 다짐하는 나폴레옹이었지요.

(로슈자클랭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카루젤 광장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로슈자클랭은 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고향인 방데 지역으로 내려갑니다. 국왕 폐위와 뒤이은 공화국 선포는 수 백년 유서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인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였죠. 국왕이 폐위되고 모두가 평등한 시민국가라...그렇다면 나와 같은 귀족 가문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찌되는 것이란 말인가? 그는 마땅히 국왕에게 충성하면서 그 전투에서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가 가진 평소 신념에 의하면 말이죠. 그러나 21살 이라는 젊은 나이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에게 인생의 다른 기회를 잡으라고 속삭였습니다. 그가 가진 평소의 신념대로 국왕께 충성을 다하고 일부 반역자들에게 선동당하는 가엾은 백성을 구하기 위한 다른 길이 있다고 말이죠.
무엇보다도 로슈자클랭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바로 스위스 용병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맡은 바 임무 수행을 위해 마지막까지 싸웠고 최후의 일인까지 그들이 모시던 왕실 일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물론 그들은 가난에 사무친 자들이었고 그들에게 사실 죽음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바로 '가난'이었기 때문에 목숨으로 돈값을 해야하는 용병으로서 임무 수행을 한 것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리없는 - 아마 알았어도 그에게는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 - 로슈자클랭으로서는 군인으로서, 자신에게 태생적으로 정해진 체제 수호자로서의 길을 결행하게 됩니다.


그가 고향인 방데 지역으로 내려왔을 당시는 이 지역을 둘러싼 서북부 지역은 이미 반혁명의 기운이 가득 찬 상황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농민과 교회의 유대가 돈독했고 덕분에 다른 지역과는 달리 귀족이나 교회의 수탈이 상대적으로 적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지난 바스티유 습격 이후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던 '대공포' - 지역의 농민들이 산발적으로 봉기해서 영주의 성이나 교회를 습격하고 귀족과 성직자를 살해하던 사건들 - 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파리에서 일어나는 혁명의 열기에 농민들이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앙에서 벌어지는 일을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 그토록 믿고 따르는 우리 성당 수사님들이 반역자라니? 우리를 외적으로부터 지켜주고 보호해주던 저 늠름한 귀족들이 반역자들이라니? 평소 깊은 신앙심을 가졌던 그들은 혁명정부가 추진하는 정교분리 정책과 종교의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에 저항하는 수사들을 가차없이 처벌하는 새정부의 정책에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혁명정부가 추진한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해방정책은 (공적영역은 물론 제외!) 여성들에게 가정에서 남성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보장하면서 남성의 통제 없이 이혼의 자유와 상속, 재산 분배, 자녀 양육까지도 허용하고 있었죠. 이는 이들에게 바로 '가정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과 다름 없게 느껴졌습니다. 감히 여성들에게 이혼의 자유를 주면서 교회의 가르침에서 이탈하는 타락의 길을 열어 주다니! 이게 나라냐! 이게 정부냐! 이런게 새로 세워진 국가의 실체라니!
그리고 더 그들을 격분케했던 것은 바로 혁명정부에서 내려온 징병제의 명령이었죠. 당시 혁명정부는 사상 최초로 '국민개병제'를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유럽 구체제의 군대에 맞서서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이는 기존의 농경체제에 익숙한 농부들, 한참 농번기에 농사를 지어야 하는 농부들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명령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봉기했고 열흘만에 방데 지역 전체가 반혁명의 분위기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이는 서북부 전체, 무려 프랑스의 3/1 의 면적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죠.
군인인 로슈자클랭이 21살의 젊은 나이긴 했지만 이들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반혁명군을 이끄는 첫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무장 봉기에 격분한 혁명정부에서는 이들을 '반도'로 규정하고 가차없는 진압을 명령했습니다. 토벌대 사령관으로는 장 바티스트 클레베르가 파견되었는데 그는 위 그림의 솔레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참패를 안겨주고 이후 12월 13일에는 르낭 전투에서, 그리고 12월 23일에는 사브네 전투에서 방데 반란군을 궤멸 직전까지 토벌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참패를 겪으면서도 방데 지역의 반란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죠.

로슈자클랭은 혼신을 다해 열심히 싸웠습니다만, 군인이라 해도 21살의 젊은 나이, 게다가 그가 복무했던 부대는 왕궁 수비대였습니다. 시쳇말로 좋은 집안의 귀족 도련님들이 곱게 군생활하는 근위대 출신 장교가 클레베르같은 역전의 용사를 상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솔레 전투에서 참패한 로슈자클랭은 간신히 탈출하여 생존한 농민병들을 모아 게릴라 전으로 투쟁을 계속합니다만...
그래서 그 결과가....
(21살 짜리 애송이를 군 지휘관으로 삼으면 어떻게 된다 ?
그랭빌 공략전에서 온갖 삽질을 하다 다 말아먹고 게릴라전으로 전환했다가
결국 22세의 나이로 전설이 된 로슈자클랭 백작...)
.......-_-;;......이라고 나시카님께서 평하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