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우산을 잃어버리다

8월의 마지막 날인데 비까지 오니 시 몇 편 ^^ 






9월

 

      헤르만 헤세

 

 

정원이 슬퍼한다

꽃송이 속으로 빗방울이 차갑게 스며든다

임종을 향하여

여름이 가만히 몸을 움츠린다

 

높은 아카시아 나무에서

잎이 황금빛으로 바래져 하나씩 떨어진다

죽어가는 정원의 꿈 속에서

여름은 놀라고 지쳐 웃음짓는다

 

여름은 아직도 장미 곁에

한참을 머물며 위안을 찾다가

그 크고 지친 눈을

조용히 감는다







우산을 잃어버리다


                    김기택

 


버스에 오르자마자 우산은 갑자기 난처해졌다.

우산은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가

남의 바지를 두어 번 슬쩍 적셨다가

좌석에 잠깐 기댔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구두들에게 밟혔다가

슬픈 눈이 잠시 헛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슬며시 없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비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우산을 찾았으나

우산은 제자리에 깊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잃어버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오래전부터 비가 그치기만 하면 사라졌다는 듯이

 

우산은 민첩하게 제 길을 찾아냈다.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듯

스스로 찾아낸 자리를 영영 떠나지 않았다.

비가 내렸으므로 나는 다시 우산이 필요했다.

비가 더 많이 내렸으므로 잃어버릴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해졌다.

떨어진 꽃잎들은 껌처럼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 손에는 하나같이 우산이 들려 있었다.

 

우산들은 어떻게 공기 속에서 비 냄새를 찾아내

첫 빗방울이 떨어지자마자 활짝 펴지는 것일까.

눈물은 어떻게 슬픔이 지나가는 복잡한 길을 다 읽어두었다가

슬픔이 터지는 순간 정확하게 흘러내리는 것일까.

저 많은 꽃들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봄과 나뭇가지에 마련된 자리에 찾아와 한꺼번에 터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면 저 많은 우산들은

어떻게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자리를 찾아 일시에 증발해버리는 것일까.

흙바닥에 뒤엉켜 있는 꽃잎들은

어떻게 한 치의 오차 없이 저 자리를 찾아낸 것일까.

슬픔이 흘러나오던 자리는 어떻게 감쪽같이 명랑해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자마자 저 많은 손들은

어떻게 우산을 잃어버린 걸 완벽하게 잊는 것일까.

 

내 손에 우산이 없는 걸 보고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견딜 수 없네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가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참 마음은 한길에 서 있으니

      • 마음이 비를 듬뿍 맞았겠네요. ^^ 






        지금은 비가




                      조은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다오. 그러면


        나는 노루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


        아, 기적같이


        부르고 다니는 발길 속으로


        지금은 비가......


         


         

    • 오랜만에 좋은 시들 읽네요.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






        비 맞는 습지




                  조은


         




        비 온다


        허공 속 지름길을


        빗방울들이 달려온다


        나는 세종문화회관 널찍한 계단을


        풀죽어 오른다


        계단 위에선 연인들이 싸우고 있다


        둘은 오랫동안 같은 곳을 향해 왔는지


        등이 젖었다


         


        가보지 못한 길부터


        젖고 있는 삶이여


        내 안의 습지여


        꿈꾸고 있는가


        사막의 진실, 사막의 고요, 사막의 순수


         


        비 오는 날


        축축한 몸에


        눈에


         



    • 여름의 임종..

      쓸쓸하네요.
      • 그 뜨거웠던 여름이 순식간에 가버리니 허무해요. 






        우산




                    박연준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 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펼 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 우산도 집안의 귀중품이고 좋은 우산 쓰는 순서가 정해져 있던 때가 바로 얼마 전 같아요. 지금은 집에 쓰지도 않는 우산이 20개 가까이 되는데 돈 주고 산건 하나도 없군요

      • 좋아하던 형광주황색 우산이 고장 나서 이제 칙칙한 우산들뿐이네요. 


        비 오는 날 밝고 환한 우산을 쓰면 기분 좋아요. ^^






        봄비




               이형기


         



         



        밤,


        봄비는 창에 스민다.


        기다림에 지친 마음이 젖는다.


         



        봄,


        밤에 내리는 비


        반 옥타브 낮은 목소리


         



        물기가 배인 육신의 무게를


        가눌 길 없구나.


        봄밤에 비 온다.


         



        먼 사람아 당신의 손길은


        봄비와 같이 성가시다.


        잠재워 다오.


         



         

    • 여름의 임종…너무 갑작스럽네요…ㅠ
      • 가을의 기습에 잠깐 물러섰다 반격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여름이 그냥 떠나버린 듯... ^^






        분수


         


                    이형기


         


         


        너는 언제나 한순간에 전부를 산다.


        그리고 또


        일시에 전부가 부서져 버린다.


        부서짐이 곧 삶의 전부인


        너는 모순의 물보라


        그 속에 하늘을 건너는 다리


        무지개가 서 있다.


        그러나 너는 꿈에 취하지 않는다.


        열띠지도 않는다.


        서늘하게 깨어 있는


        천 개 만 개의 눈빛을 반짝이면서


        다만 허무를 꽃피운다.


        오 분수, 냉담한 정열!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14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53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6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9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5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6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36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53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9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3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30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41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72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8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90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