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보다 긴 하루> 후기

지난 주에 읽으려고 했던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를 며칠 전에 다 읽었어요. 


제가 책을 그렇게 느리게 읽는 편이 아닌데 이 소설은 이상하게 아주 천천히 읽히더군요. 


50페이지 정도 읽고 나서 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예지게이가 마음에 들었고,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결코 이 책을 빨리 읽을 수는 없으리라는 것도 알았어요. 


작가의 생각을 풀어놓은 글은 휙휙 빠르게 읽을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글은 그리 쉽게 빨리 읽어 나갈 수가 


없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 어쩔 수가 없다, 이건 느리게 읽는 수밖에... 체념하고 느릿느릿 읽었어요. ^^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요약하기는 참 어렵네요. 별로 요약하고 싶지도 않고... ^^ 


이 소설은 주인공 예지게이가 까잔갑이라는 지인의 죽음을 알게 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 사람의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끝나요. 


그 시간은 사실상 하루 정도였겠지만 예지게이의 까잔갑에 대한 기억, 친구인 아부딸리쁘와 사랑했던 여인 자리빠에 대한 기억 등을 


통해 예지게이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주욱 훑어내듯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제목이 <백년보다 긴 하루>인가 봐요. 


장편소설을 읽은 후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작가의 역량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흐트러짐 없이, 독자를 끌고 나가는 힘을 잃지 않는 소설이었어요.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중앙아시아의 오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아무 이질감 없이 설득되는 걸 보며 신기했고요. 


소설의 중간 중간에 나오는 아름답고 슬픈 전설들이 이 소설의 내용과 맞물리면서 제 마음 속의 뭔가를 울리곤 했어요.   


주인공의 친구 아부딸리쁘가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부분에서는 저도 제 삶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자신이 살아온 삶조차 제대로 기억하기는 참 힘든 것 같거든요. 열심히 쌓아온 지식과 지혜도 머리 속에 계속 남아있지는 않는 것 같고요. 


혼자 머리 속에 쌓아 놓았다가 세월 속에서 슬그머니 휘발되어 버리는 지식, 다른 사람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지식은 


혼자서 즐긴 쾌락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나이가 한참 들고난 이제서야 왜 학자는 논문을 써야 하고, 왜 작가는 책을 써야 하고, 왜 가수는 음반을 내야 하는지 수긍하게 돼요. 


사람의 지식과 능력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를 않으니까요. 그때 쓰지 않으면 쓸 수가 없고 그때 만들지 않으면 만들 수가 없어요. 


부족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아는 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 기록해 두지 않으면 지금 내 머리 속에


있는 것들, 지금 내가 느끼는 것들은 다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요. 


내 것을 흠 잡힐 일 없이 완벽하게 만들겠다는 욕심보다는, 부족하지만 내 것을 다른 사람들이 더 나은 것을 만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디딤돌로 남겨두겠다는 겸손한 마음이 오히려 그런 기록을 쉽게 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같기도 해요. 


예지게이의 분신과도 같은 사나운 수컷 낙타 까라나르가 발정기에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며 예지게이 자신도 사랑하는 자리빠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격정과 욕망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그린 부분도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특히 사랑하는


마음과 그 고통을 묘사하는 글에 약해서 그 부분에서 특히 집중하면서 재밌게 읽었어요. ^^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예의가 어떤 형식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생각해 봐야겠어요. 


빨리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행간도 좁고 ^^) 거의 일주일에 걸쳐 조금씩 읽으면서도 흐름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읽게 만드는 


재밌는 소설이었어요. 사실 이 소설을 읽기로 결정했을 때 호기심은 있었지만 별로 제 취향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읽어나가는 동안 


오묘하게 제 취향인 부분들이 새록새록 드러나서 신기했어요. 아무래도 제 취향은 저보다 듀게분들이 더 잘 아시는 듯... ^^ 


지금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3분의 2쯤 읽었는데 이 소설은 쉽게 읽히긴 하는데 읽고 나면 뭘 읽었는지 멍~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만큼이나 독자인 저를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하는 소설이네요. ^^ 


이 소설은 다 읽은 후에 다시 짧게 후기를 올릴게요. 다음 독서 계획도 그때 생각해 보고요. 


(물론 저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으신 세계문학소설이 있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 


요즘 소소한 글을 계속 올리다 보니 독서 후기가 자꾸 뒤로 밀려서 오늘 듀게가 뜸한 틈에 얼른 올려봅니다. ^^ 



 

    • 산지 꽤 오래됐는데 100p까지 읽고 방치하고 있네요 마저 다 읽고 이 글 읽어볼게요
      • 이 소설이 그렇게 빨리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산 증인이 나타나신 것 같아 몹시 반가워요. ^^


        이런 독서 후기에는 댓글 달리기 힘들 거라고, 고독을 씹을 각오를 다지고 있던 참이라 더 반갑고요. ^^ 


        다른 사람이 추천하는 책을 읽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고, 다른 사람과 함께 책을 읽는 것도 재밌는 경험인 것 같아요. 


        제 후기의 내용이 별로 쓸모는 없겠지만 누군가 이 더운 여름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파에 님께 에너지를 불어넣어줬으면 좋겠네요. ^^   

    • 책장 넘기기가 아쉬울때가 최고의 시간이라고도 할수있겠어요 만화도 그랬지만,어쩌면 매일 하루의 생각이 평생의 그것과 별 다르지 않을거란 생각도 듭니다 완성된 생각이 모양을 가진 삶을 다 원하겠지만 사는건 그모양이네요 그모양은 그모양이에요.
      • 책이 끝날 즈음에 책장 넘기기가 아쉬워서 아껴 읽었다는 말을 사실 저는 이해를 잘 못했던 사람인데 


        (재미있으면 끝까지 얼른 휘리릭 읽어야지 아끼긴 왜 아껴, 뭐 이런 사람이라... ^^)


        이 책도 뭐 그리 아껴 읽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아껴 읽게 되다 보니 이렇게 천천히 


        조금씩 읽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네요. 저는 재미 있으면 빨리 읽고 재미 없으면 느리게 읽는 사람인데


        재미 있는데도 느리게 읽히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좀 신기해요. ^^ 

    • 우와 읽으셨군요! 이렇게 정성스런 후기라니 추천자로서 엄청 뿌듯합니다요... 똑같은 내용이라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른 것이, 저는 이 책 읽을 때 그 풍광 묘사가 참 인상적이더라고요. 구글 어스로 사로제끄를 찾아봤더니 카자흐스탄 남부, 우즈베키스탄과의 국경을 맞댄 스텝지대에 이렇게 한 점을 찍어주더군요. 이렇게 한 때 물이 흘렀던 자국만 동글동글 남아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에도 사람이 살아 보겠다고 나선 게 참 대단하지 않나요. 뜬금없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한 번 타 보고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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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자님이 뿌듯하시다니 저도 뿌듯해요. ^^ 저는 지리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사로제끄가 어디 붙어있는지 


        찾아볼 생각도 안 했는데 덕분에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도 한번 찾아보고 중앙아시아에 어떤 나라들이


        있나 한번 찾아봤네요. 스텝 지대는 초원에서 목축을 하는 뭐 그런 평화로운 지역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 여름과 겨울에 엄청나게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정이 뚝 떨어졌어요. ^^ 지금은 좀 덥지만 


        우리나라 기후가 살기엔 괜찮은가 싶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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