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하늘을 찍었어요

해만 찍었어요. ^O^

제가 좋아하는 핑크빛 하늘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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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만 덩그러니 있는 사진을 올리려니 허전해서 며칠 전에 읽은 (소설가지만 시집도 낸) 


한강 시인의 시 몇 편 올려봅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괜찮아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서시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 한강 처럼 석양은 영원히 가고 영원히 남고.


      확실하게 일출 일몰 구별하기가 쉽지 않아요.

      • 얼마 전에 일출 그림과 일몰 그림을 보면서 제목에서 말을 안 해주면 구별을 못하겠다 


        느꼈는데 사진도 그렇네요. 


        해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태어날 때와 죽을 때는 비슷해지는 것 같아요. ^^ 








        마크 로스코와 나 2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이렇게 멎는다


        기억이


        예감이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도




        스며오는 것


        번져오는 것


        만져지는 물결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의 피




        어둠과 빛


        사이




        어떤 소리도


        광선도 닿지 않는


        심해의 밤


        천년 전에 폭발한


        성운 곁의


        오랜 저녁




        스며오르는 것


        번져오르는 것


        피투성이 밤을


        머금고도 떠오르는 것




        방금


        벼락 치는 구름을


        통과한 새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 영혼의 피












        Mark Rothko - No. 14 (Red, Blue over Black)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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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도 없고 심심하니 시 몇 편과 지금 듣고 있는 노래 몇 곡 ^^








      몇 개의 이야기 6






      어디 있니. 너에게 말을 붙이려고 왔어. 내 목소리 들리니.


      인생 말고 마음, 마음을 걸려고 왔어. 저녁이 내릴 때마다


      겨울의 나무들은 희고 시린 뼈들을 꼿꼿이 펴는 것처럼 보여.


      알고 있니. 모든 가혹함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가혹해. 














      조용한 날들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조수미 - 한국가곡 앨범


       



    • 마크 로스코 그림을 보러 가고 싶네요. 저렇게 한 그림, 한 그림이 널찍한 벽에 걸린 미술관으로. 미술관에 간지가 좀 된 것 같네요.. 그리워라. 시 잘 읽었어요.

      • 로스코의 그림은 텅 빈 공간에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과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






        왼쪽 - Black on Maroon (1958),  오른쪽 - Red on Maroon (1959)


        Mark-Rothko-paintings-han-011.jpg



    • 로스코 그림 + 관람객 뒷모습에 꽂혀서 이 조합으로 찾은 사진 몇 개 ^^ 






      White Center 1957


      YYJLoxl.jpg








      No.9 (Dark over Light Earth) 1954, no.61 (Rust and Blue) 1953, No.46 (Black, Ochre, Red over Red) 1957


      cIgzlk5.jpg








      Untitled 1953, No.14 (White and Greens in Blue) 1957, Untitled 1949


      OLaNYy8.jpg








      Untitled 1959, Untitled 1959, Untitled 1959 (Seagram Murals, Untitled Mural for End Wall)


      ntKWhHP.jpg


      이 자리엔 언젠가 제가... ^^  



      • 언젠가 갈 수 있을 거예요. 저도 가게 되면 인증글을 듀게에 ㅎㅎ

        • 인증은 꼭 뒷모습 사진으로 ^^ 


          남자친구와 함께 가신다면 마치 아무 사이도 아닌 것처럼 이렇게 ^^ 




          No.5/No.22 1950, No.3/No.13 (Magenta, Black, Green on Orange) 1949, 


          No.37/No.19 (Slate Blue and Brown on Plum) 1958, No.16 (Red, Brown, and Black) 1958


          PfECtHH.jpg






          저녁이 되었으니 시 한 편 ^^








          저녁의 소묘 4






          잊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


          부스러질 것들




          부스러질 혀와 입술,


          따뜻한 두 주먹




          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




                                         무엇인가


                                         반짝인다




          반짝일 때까지 







    • 좋은 시들 고마워요. 사진두요.



      • 아무래도 로스코 채플을 빼놓으면 좀 아쉬울 것 같아요. ^^






        Rothko Chapel 1967


        IyE4F5g.jpg










        np9cW5H.jpg










        몇 개의 이야기 12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과 같다.







    • 시 너무 좋네요. 마크로스코랑 병치시켜놔서 그런지 울림이 커요. 

      • 처음에 핑크빛 하늘 사진으로 시작해서 한강 시인의 시를 거쳐 로스코 그림까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맘대로 떠돌다 보니 다시 핑크빛 하늘을 연상시키는 그림으로


        깔맞춤을 하고 싶은 이상한 의욕이 솟네요. ^^ 


        제목을 보고 멋진 노을 사진을 기대하고 들어오셨다가 엉뚱한 내용만 있는 걸


        그래도 즐겁게 봐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Untitled (Gray and Mauve)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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