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직장인’ 의 쪼잔함 또는 약속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

   1.

  여러분 오랜만. 날이 춥군요. 그렇지만 겨울에 추운 건 좋아요. 장마철은 물론 냉방에 무지 약한 고로 한여름에도 긴소매 옷을 벗지 못하는 냉혈인간인데(올여름 그 더위에도 저녁 야근을 대비해 꼭 레깅스를 챙길 만큼) 이즈음 깨달은 건 겨울 추위, 그러니까 자연적인 추위는 예전에 비해 많이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주변에서 다들 춥지 않느냐고 덜덜 떠는 오늘도 저는 날씨에 비해 얇은 차림을 하고도 끄떡없다는 걸 깨닫곤 확실히 근육량과 추위는 상관이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 이상하게 펑크 난 오늘 약속에 대한 원망을 과격한 운동으로 극복하고 들어왔어요. 그리고 방금 전까지 온 옷장을 다 열어놓고 한바탕 난리굿을 펼쳤습니다. 겨울을 가장 좋아해요. 왜냐하면 제가 멋진 옷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계절이기 때문이죠-_-. 그런데, 그럼 뭐하나요. 요즘 들어 약속들은 줄줄이 취소되고 즐거운 곳에서는 절 오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좀 삐치고 쪼잔한 상태입니다. 사연인즉은.

 

  2.

  근 6년 넘게 못보다가 최근에 제게 연락을 해 온 지인이 있습니다. 올봄에 제가 귀국한 뒤 한 번 정도 통화한 사이이고 연락처는 서로 알고 있지만 그저 잘 살고 있겠거니 하며 적극적인 궁금증은 거세한 사이랄까. 아시다시피 서울 생활이 다들 너무 바쁘고 정신의 기름기를 쏙 빼 갈 만큼 빡센 고로. 그렇지만 만나게 된다면 정말 반가울 것 같은 사람.

 

  그이에게 연락이 온 것은 몇 주 전이었고 저는 무척 반가워 이참에 한 번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고(저는 개인적으로 ‘언제 한 번’ 이라는 공수표를 정말 싫어하기에) 상대방 역시 무척 반기는 눈치여서 구체적인 약속을 정하게 됐죠. 이 과정에서 저는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날까에 대한 내용에 저에 대한 배려라고는 단 1g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 직장인인 제가 근무지로부터 무려 1시간 넘게 소요되는 장소에 그것도 하루 업무 정리하느라 바쁠 오후 5시에 덜컥. 제가 어디에 어떻게 일하고 있다는 건 몰라도 적어도 직장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일러 상대방도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잡은 약속시간이 오후 5시, 그것도 자신은 전혀 움직일 필요 없는 근접지역에. 물론 이것이 그저 의견일 뿐이고 조정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저는 마음이 언짢았어요. 더욱이 이 모든 답변은 제가 약속을 확정하는 메시지를 보낸 뒤 하루가 다 지난 다음 -그러니까 잡아놓은 날짜 전날에 보낸 확인문자를 답장도 않고 있다가 약속 당일 정오가 지나 답변하는 식-에 저는 그냥 어안이 벙벙.

 

  이 친구 보라고 한껏 멋을 부리고 만날 필요는 없었지만, 지란지교를 꿈꾸며에 나오는 내용처럼 비 오는 날 편한 옷을 입고 서로 부침개를 부쳐 먹어도 좋을 만한 사이는 아니었기에(게다가 6년 만에 만나는 약속인데!) 약속 전날에 답변에 없는 것은 만날 의지가 없거나 아니면 다른 상황이 개입되어 만날 수 없게 됐다는 암호로 받아들이고 저는 잠정적으로 약속을 취소한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상대는 정작 당일 오후가 되어 저의 상항과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시간과 장소를 제시하며 약속을 확인하는데 저는 도저히 그렇게는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죠. 내 옷차림이 어떠하든 화장이 어떠하든, 저는 119를 불러야 할 만큼 위급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번개적인 성질의 만남을 지양하는 성격인 것이 까탈이라면 까탈. 어쨌든 조만간 다시 날을 잡자고 한 것이 이번 주였고 약속을 제가 깬 건 아니지만, 제가 먼저 연락해서 보자고 하는 것이 자존심과는 하등 상관없는 사이라서 엊그제 연락을 했습니다. 금요일쯤 보자구요. 바로 답장이 오더군요. 좋다고. 그런데 이번에도 본인이 사는 동네로 약속장소를 일방적으로 정했는데 저는 그 동네가 초행인데다 제가 퇴근하는 시간과 동선을 생각하고, 잘 모르겠지만 그 동네에서 나와도 중간지점이 될 만한 곳으로 제안했어요. 답이 없습니다. 저는 어쨌든 약속은 확정했고(같은 약속 자꾸 번복하는 것도 실없는 사람 같아서), 당일에 시간과 함께 장소는 제안했던 두 곳 중 한곳으로 정하면 되겠다 싶었어요. 또 답이 없었지만 당일에 연락와도 이번엔 봐야겠다 싶어 오전 내내 기다리는데 연락이 없어서 제가 메시지를 보냈더니, 어제 제가 제안한 장소에 대한 추후 설명이 없어서(정작 예스든 노든 대답은 상대가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약속이 미뤄진 줄 알고 있었다며 다음에 보자는 둥 블라블라블라.

 

  제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진짜 꼰대가 되어가는 걸까요? 지금보다 불과 몇 살이 어렸을 때만 해도 사생활이 어떻든 사람과 일상을 어떤 태도로 어떻게 꾸려가든 상대방이 가진 재능이나 저의 애정도로 많은 것들을 감당할 수 있었던 에너지가 이젠 바닥이 난 걸까요? 화가 납니다. 저는 보자고 했으면 보는 사람이고, 이것은 결코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약속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줄줄이사탕으로 약속들이 취소되는 것을 보며, 제 인간관계의 궤도가 대폭 수정되는 중인가 아니면 사람들은 그냥 공수표 남발하듯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보자고 했다가 또 귀찮고 맘 변하면 납득할 수 없는 핑계를 대가며 잘도 잡은 약속을 잘도 취소하며, 나는 그들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전락한 것인가 하는 피해의식도 조금 느껴집니다. 즉물적으로, 외국 생활 두 번만 하면 가족을 제외한 인간관계 다 끊어진다는 말도 들었는데 이게 진짜 그 전조인가 싶은 생각도 들고요.

 

  약속을 정하고, 서로에게 좋은 날짜와 장소를 잡고, 당일에 준비를 하고 나가는 저에게 충분히 납득할 수 없는 취소들은 어떤 회의감마저 들어요. 내가 무슨 술약속 밥약속 못 잡아 안달난 사람도 아니고, 상대방도 귀한 시간 내주는 거지만 저 역시 금쪽같은 운동시간을 포기하면서까지 나가는 것인데, 그만큼 상대방들에 대한 애정이 있고 만남에 대한 기대가 있고 그래서 성의를 갖고 약속시간을 기다리는데, 뚜렷한 이유도 없이 마치 쇼핑몰 환불정책조항처럼 단순변심임이 분명한 군색한 핑계들을 대며 제 계획마저 무산시키는 태도들이 적잖게 당황스럽습니다.

 

  3.

  더불어 이런 생각도 해봐요. 아주 친한 친구 말에 의하면 저는 어떤 경우에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이를테면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거나(자세를 긴장시키느라 온몸이 뻐근할 만큼 취하지 않은 척을 했겠지만), 언제 만나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세팅되어 있다고(스타일이 좋다는 말일 수도 있는데 편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 전자든 후자든 그건 사실입니다. 고로 저는 당일에 취소되는 약속 못지않게, 당일에 갑작스레 정해지는 약속도 좋아하지 않아요. 아주아주 친한 사이라 해도 위급한 상황을 제외하고 그건 곤란하죠. 왜 그럴까요. 저는 어떤 면에서 늘 힘을 주고 있거나 아니면, 상대방으로부터 정도 이상의 접근에 대해 아주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사실 연애할 때도 그랬어요. 그때야 어떤 식으로든 한껏 치장하고 나가고 싶은 마음에 일주일 내내 뭘 입을까 뭘 신을까 고민하다가 그중 가장 나은 모습으로 나가게 되면 저는 딱 거기까지이고 싶었거든요. 이를테면 제가 샤방샤방한 차림이면 그날의 내 모습은 샤방한 컨셉으로 기억되고 그걸로 끝인 것이지, 결코 샤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속옷을 노출시켜야 하는 모텔행이나(그렇다고 위아래가 짝짝이인 속옷을 입어본 적은 없지만-_-) 말끔히 정리되지 않는 화장이 떡진 채 아침이면 도리어 얼굴에 착 먹어버린 얼굴을 보여주는 건 끔찍하다고 느꼈거든요. 엠티나 워크샵도 좋아할 리 없지요. 낯선 공간에서 너무나 편안한 차림으로 자연스러움을 지향하다 못해 방만해지기 십상인 그런 분위기에 계속 앉아 있어야 하는 게 저는 무척 힘듭니다. 말할 수 없는 결점 때문에 제일 늦게 잠들어 제일 일찍 일어나야 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면 저라는 인간은 편안함이라는 명분 뒤에 도사리고 있는 퍼질러앉음에 대한 경계가 너무 심한 걸까요. 사실 창살 없는 감옥 같았던 외국 생활의 어떤 단면에서 제가 가장 듣기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아울렁더울렁 다 섞여서 사는 것이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게 인간이다는 논리로 무장된 어떤 사람들을 대하는 일이었어요.

 

  4.

  다시 2로 돌아와, 제가 뭣 때문에 화가 났나 곰곰 생각해보니 이즈음 약속들이 어긋난 사람들은 대부분 자유직업군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어요. 한때 저도 낮밤을 거꾸로 살았던 세월이 길었던지라 그 리듬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교집합처럼 겹치는 시간이란 분명 존재하잖아요. 약속은 그 드문 시간을 이용해서 잡는 것이죠. 어느 쪽도 무리를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것들이 고려되어야 해요. 나와 상대방의 상태, 경제상황, 기후, 갑작스러운 변수들 기타 등등. 이런 거 저런 거 다 따지고 만나면 그게 친구냐고 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저는 어떤 친구와도 대체로 그래왔어요. 아무튼, 중간지점을 찾는 것이 관건인데 그 노력이나 관심이 결여된 이런 종류의 결과물에 대해선 상대방의 무심함과 무신경을 탓해야 하는 지, 아니면 작은 것 하나도 소홀하지 못하는 제 지랄 맞은 성격을 탓해야 하는 지. 어쩌면 제가 알량한 직장 다닌답시고 쪼잔하게 구는 것은 아닐까 자아비판도 해보지만, 이랬다저랬다 쉽게도 뒤짚는 손바닥이 되기엔 저는 소중하니까요. 

 

 

    • 핸드폰이 일상화되면서 약속의 무게가 옛날보다 많이 준 것 같습니다.
      세태가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하고 살지만
      여섯 시에 약속장소에 혼자 앉아

      「지금 막 지하철 탔어」
      「차가 밀리네 한 20분은 늦을 것 같아」
      「먼저 먹고들 있어. 2차에나 붙겠다」

      이런 문자들을 받고 있자면
      세상이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건 연락이 닿을 수 있다는 믿음이
      챙겨야 할 때 챙겼어야 하는 일들을 미루게 만들고
      그래서 사람 사이의 끈이
      이전보다 성겨지지 않았을까요.
    • 예리한 지적이십니다. 걸려오는 전화 한 통, 편지 한 장을 기다리며 사람을 진짜 기다리던 시절 이야기 하면 코웃음을 칠까요? 정작 저도 그런 단순하고 무책임한 편안함에 기대면서.
    • 왠지 1촌공개 사진이라도 보고싶은 이 심정 ^^;
    • 글을 읽으면서 어떤 종류의 화가 느껴져서 왜 그런걸까 했어요.
      사실 누가봐도 그사람이 이상한사람이에요.(쪼잔함이나 알량함 따위가 아니라)
      어제 본 사이라고 해도 약속을 그렇게 잡아선 안되는건데 말이죠. 계절 탓이려나.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만나는 것이 자기중심적으로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아요. 어렸을 적엔 누군가를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느낌이 들어도 싫지 않았는데, 아니 되려 기분이 좋기도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 시간에 다른 무언가 효율적인 것을 할수있을텐데 하고 말이죠.
      그래서 어떤 친구를 만나는데 꾸밈의 필요성이 느껴진다거나 배려라는 영역이 신경쓰인다면 그것도 좀 비효율적인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버리죠. 그래서 누가됐든 상관없이 같이 취해주고, 같이 망가져줄사람을 찾는거겠죠. 부담감이 싫은거에요. 아니 귀찮죠.
      자신이 얼마든지 망가져도 좋을 상대방 말이에요. 근데 그분은 그냥 좀 많이 많이 게으른 사람 같아요. :-/
    • Koudelka님께 요즘이 이파리들을 떨굴 시간 같군요 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가 하시겠죠.
      약속 상대방이 원래 배려심 없는 사람일 수 있고요.
      관계의 질량,무게감 차가 교류가 없는 동안 폭이 더 벌어졌는지도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한다면 굳이 그걸 가지고 고민하시지 마셨으면 해요.
      마치 술 못마시는 사람에게 너는 왜 술을 안마시니, 같이 마시고 취하자 라고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요.
      대신 만남의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만 더 권해드리고 싶어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얘기지만 어느 영화의 말처럼 한계를 꼭 넘어서야 하나요.
      지내다 보면 넘을 수도 있고 못 넘을 수도 있죠.
    • 아침엔/ 올해 단 한 장의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했고 따라서 업뎃도 없이 제 싸이는 무덤 중 ㅎ ㅎ
      아비게일/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만나는 것이 자기중심적으로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아요. 어렸을 적엔 누군가를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느낌이 들어도 싫지 않았는데, 아니 되려 기분이 좋기도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 시간에 다른 무언가 효율적인 것을 할수있을텐데 하고 말이죠. 그래서 어떤 친구를 만나는데 꾸밈의 필요성이 느껴진다거나 배려라는 영역이 신경쓰인다면 그것도 좀 비효율적인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버리죠. 그래서 누가됐든 상관없이 같이 취해주고, 같이 망가져줄사람을 찾는거겠죠. 부담감이 싫은거에요. 아니 귀찮죠.
      자신이 얼마든지 망가져도 좋을 상대방 말이에요.'

      헉! 제가 한국에 돌아와 만난 지인들에게서 받은 느낌이 대부분 이것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여전하니(?) 그것이 그들에겐 배부른 투정같은 철없는 거리감으로 느껴졌을까요?
    • kona/ 이파리는 이미 몇 차례에 걸쳐 크게 떨군 상태고... 어쩌면 까치밥으로 남겨둔 지인이라 더 그런 걸까요? - -;; 그런데, 예전엔 관대하게 지나갈 수 있었던 것들이 점점 더 참을 수 없어지는 지경에 종종 이르는 걸 보면 저도 적잖이 나이먹어가는 것인지도요.
    • 저랑 비슷하시네요. 그래서 대학다닐때도 부모님 핑계로 엠티 등을 가지 않았고요. 혹자들은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느냐고 묻는데, 피곤하더라도 흐트러진 모습보이는 게 더 싫은 걸요. 그리고..저도 저런 지인 있었는데 결국 버렸습니다..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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