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스티브 잡스)
(두 영화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보통은 빨리 퇴근하면 그냥 집에 들어가 집밥 먹고 좋아하는 드라마나 돌려보고 하는 걸 좋아하는데,
어제는 왜인지 집에 들어가기보다 뭔가를 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불러 술이라도 마실 수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혼자 있고 싶었어요. 혼자 뭔가를 하고 싶었죠.
그래서 직장에서 15분,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극장의 영화 시간표를 보다가
간단히 저녁 먹고 보면 딱 맞는 시간대가 있어 캐롤을 예매했습니다.
있는 포인트 탈탈 털어서 내는 돈 없이 기분 좋게 예매했어요.
얼마 전에도 이렇게 영화를 예매했다가 막상 시간이 되니 너무 피곤해져서 예매를 취소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고,
마침 퇴근시간에 윗분들이 자리를 비우셨거나 안 계셔서 정확히 6시에 문을 나섰습니다.
해가 좀 길어져 아직 밖은 환했고 가는 길에 저물어져가는 자주색 그라데이션 하늘을 구경할 수 있었어요.
살면서 거의 없는 거의 완벽한 퇴근길의 느낌이랄까요.
햄버거로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따뜻한 우롱차를 사서 극장에 들어가니 시간이 딱 맞았습니다.
평일 저녁인데도 극장 안에 사람이 많더군요.
이 영화가 이렇게 인기 있는 작품이었나 잠시 놀라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광고에 지쳐갈 때즈음 영화는 시작됐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내용만 알고 갔지,
시대적 배경도 몰랐고 루니 마라가 나오는 줄도 몰랐고 토니 헤인즈 감독인 줄도 몰랐어요.
음. 분명히 토니 헤인즈 작품을 봤을 텐데 뭘 봤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했지만 그럴 틈도 없이 영화에 빠져들었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좋았어요.
그리고 점점 더 생각나고 생각할수록 더 좋아져요.
그래서 어제 영화가 끝난 뒤와 하루가 지난 지금의 좋다는 느낌의 깊이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케이트 블란쳇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갔지만 루니 마라는 너무 뜻밖이었어요.
사실 루니 마라라는 이름이 영화 시작과 함께 떠올랐을 때 혼란스러웠거든요.
아직 마라 자매의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저는
루니 마라가 언니인지 동생인지, 밀레니엄에 나왔던 배우인지 하우스 오브 카드에 나왔던 배우인지
혼자 궁금증의 소용돌이를 헤치며 동시에, 아 근데 케이트 블란쳇과 어울릴까하는 걱정까지 잠깐 했습니다.
그런데 언니인지 동생인지 어디 작품에 나왔던 배우인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전혀 감을 못 잡았지만
그와 상관 없이 제가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와 너무 다른 거예요.
헵번식 헤어스타일이 그렇게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눈망울도 헵번과 좀 닮았고 자그마한 몸집에 걸친 옷 스타일까지 유사해서,
어느 각도에서 보면 정말 오드리 헵번 같더라고요.
영화 내내 여러 얼굴이 떠올랐는데 차 안에서 창 밖을 보던 눈망울에 엠마뉴엘 베아르까지 떠올라 버렸어요.
하여간 이미지가 제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너무 많이 달라 놀랐습니다.
캐롤과 첫 식사를 함께 하던 장면이 많이 인상에 남아요.
너무 긴장해서 시금치 요리를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처럼 보였고,
캐롤과 맞담배를 피우는데 담배연기를 뿜는 방향부터 둘이 너무 달라서 재미있었어요.
케이트 블란쳇은, 아아, 예상대로였지만 그래도 너무 멋졌어요.
화려한 스타일부터 목소리, 말할 때의 억양, 옆으로 기다란 눈, 오렌지빛 립스틱을 바른 입술까지.
루니 마라와는 정 반대되는 스타일로 눈이 즐겁고 귀가 호강하고 마음이 콩닥콩닥했어요.
테레즈와 헤어지고 변호사를 만나러 가던 차 안에서 우연히 테레즈를 보게 되고 그 모습을 눈으로 끝까지 좇던 신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무엇보다 해피엔딩이라는 것이 좋았어요.
보통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비극적으로 끝나고 어제도 그렇게 끝나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더 좋았습니다.
물론 그에 다다르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지요.
하지만 캐롤의 큰 결단 - 저라는 관객은 좀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 이 그와 같은 엔딩에 큰 몫을 했다는 것이 왠지 좋았습니다.
보통 영화 속 화려한 의상에도 눈이 잘 안 갔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의상이며 소품이며 다 눈이 많이 갔고,
영화의 호흡이나 섬세함 모두 좋아서 오랜만에 영화를 보고 떨렸어요.
며칠 전에 스티브 잡스를 봤었는데 영화 자체가 나쁘지는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으로 많이 채워진 에피소드들의 의도가 저의 마음까지 움직이진 않더군요.
어떻게 보면 신선한 발상인데 저는 완전히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차라리 완전히 신뢰할 만한 상황이면 더 좋았을텐데 마지막 딸과의 대면은 너무 드라마틱해서 그냥 드라마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조금 사소하긴 하지만 거의 대사로 이루어진 영화인데 그 대사들의 타이밍에 적응이 안 돼서 말이죠.
잡스 하나에 여러 사람들이 치고 들어오는데 그 리듬에 일부 좀 이해하기 힘든 지점이 있었어요.
물론 실제 사람들 간 얽혀있는 현실의 대화들이라면 이해가 가는데 이건 의도된 각본이잖아요.
그래도 영화 보고 하도 에피소드들의 진위,
그리고 그 진위를 알게 된 후 작가나 감독의 의도가 너무 궁금해서 많이 관련 내용을 찾아보긴 했습니다.
아, 마이클 패스밴더의 스티브 잡스는 좋았습니다.
케이트 윈슬렛도요. 캐릭터가 조금... 많이 공감은 안 갔습니다만 그래도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해서 좋았어요.
하여간 두 영화 모두 오랜만에 극장 가서 본 영화인데 좋네요.
요즘엔 영화를 봐도 극장에서 나오면서 잊혀지곤 했는데, 이렇게 글을 쓰면서 다시 되짚어보고 기억을 더듬고 그 느낌을 되살리는 이 과정이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