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_시의 힘

서경식 교수의 시의 힘이라는 신간을 읽었습니다. 이분 책은 처음이네요. 독서모임의 좋은 점은 평소 내가 읽지 않을 것 같은 장르나 취향의 책까지 읽게 만든다는 점이 아닌가 싶어요. 


8장으로 나뉜 책은 꽤나 엄정한 성격을 지닌듯한 작가의 시선을 느끼게 해줍니다. 문장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많은 생각과 고민끝에 썼다는 느낌이랄까요? 학술 서적과 문학의 중간쯤에 서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시도 많이 인용되어 있습니다만 가장 마음에 와닿는 인용문은 프랑스 역사가인 마르크 블로크의 나는 왜 공화주의자인가?라는 글이었습니다. (260P)


'나더러 왜 공화주의자인가를 묻는 것 자체가, 이미 공화주의적인 것 아닐까요? 사실 그런 질문은, 다음의 것들을 우선 인정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즉 권력의 형태는 시민의 입장에서 심사숙고한 뒤에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공동체란 개개의 인간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중략) 사회는 개개의 인간을 위해 만들어지고, 각 사람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봉사해야 하므로, 자기가 속한 집단의 존재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모독이 아니라는 사실,(중략) 개개인에게 봉사하는 국가는 그들을 강제해서는 안되고, 그들을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도구로 이용하거나, 그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목적을 위해 몰아가서도 안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의 1항과 2항입니다. 


공화주의자라는 단어에 대해 명징한 정의를 내린 프랑스 역사학자의 글과 헌법 제1조, 그리고 작금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 이 시대가 얼마나 이상하고 부조리한지 깨닫게 되는데 이런 깨달음을 주는 것도 역시 글의 힘이고 책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르크 블로크는 알자스 태생의 유대계였던 까닭에 몸바쳐서 조국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라는 유형무형의 강압에 시달리다가 결국 1944년 6월 16일 독일군의 총알에 레 루슈 벌판에서 처형됩니다. 대독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이유였지요. 그리고 지금도 프랑스가 제일 자랑하는 역사가라고 합니다. 


미국의 공화당 또한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정당입니다만..  조지 부시와 마르크 블로크 사이에는 지독하게 넓은 강이 흐르고 있는 느낌입니다. 뉴스룸을 보면서 앵커인 윌 맥어보이가 공화당원이면서 또한 가장 강력하게 공화당을 비판하는 논조를 주장하는 근거에는 마르크 블로크의 공화주의에 대한 사랑이 함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헌벱 제1조를 지금 이시간에도 가장 먼저 가장 압도적으로 가장 저열하게 모독하고 위반하고 능욕하고 있는 사람이 현직 대통령이라는 것, 그를 뽑아 권력을 쥐어준 것이 우리 국민이라는 것이 참 부끄러운 아침입니다. 


    • 서경식 선생의 신간이 나왔군요. 나의 서양미술 순례로 알게 되어 꾸준히 찾아 읽고 있는데 신간 소식은 몰랐네요.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별말씀을요. 처음 읽었는데.. 꽤 인상깊었습니다. 

    • 모임 직전에 독후감을 게시물로 선빵 날리시다니 ㄷㄷㄷㄷ

    • 서경식 선생은 미술사 관련해서 좋은 글들을 많이 쓰셨죠. 특히 한국의 현대미술이 - 민중미술을 제외하고 - 편향되게 예쁘게만 그려지는 세태에 매우 비판적인 책을 내신적이 있는데, ( 고뇌의 원근법) 개인적으로 적지않은 충격을 받으면서 본 책입니다. 워낙 미감적으로 예쁜 미술품만 좋아하던터라^^;; 많은 생각을 하게되더군요.
    • 마르크 블로크의 저서 중에 이런 글귀가 생각납니다. '나는 프랑스인이다. 유대인 가정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 어떤 유대적 전통도 내게 남아있는건 없다.' 프랑스의 공화주의적 전통은 대혁명 이후 수립된 근대 민족주의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그건 바로 민족이란 역사와 언어(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일 뿐 혈통과는 무관하다는 관념입니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민족해방전쟁과 혈통을 중시하는 게르만 민족주의의 열풍을 경계한 프랑스식의 대응방법이기도 했죠. ( 이를 수립한 대표적인 학자가 에르네스트 르낭인데 그는 무엇보다도 유럽에서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가 계속된 대립끝에 전쟁에 이를 것을 염려했었죠)

      마르크 블로크는 특히 역사학의 학위를 독일에서도 받은바 있는데 사실 그의 정치적 공화주의 성향은 프랑스에, 역사적 학문적 기반은 독일에 있던 특수한 경우였죠. 전형적인 유럽식 경계인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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