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연애에 대한 이야기.
0.
정찬의 단편소설 <가면의 영혼>은 한 연극 배우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떤 배역을 맡게 되면 그것을 내면화하기 위해 일종의 제의 비슷한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해요.
의식 깊은 곳으로 침잠해서 '가면'으로 형상화된 배역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야말로 혼연일체의 연기를 가능케하는 거지요. 물론 그 가면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같은 과정을 역순으로 진행해야 하고요.
아무튼 그런 속성을 가진 주인공이 이전 배역이었던 <오셀로>의 이아고 가면과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 역을 맡게 되면서 생기는 이야기에요.
1.
일전에 듀게에서 몇 번인가 언급했던 '단골 카페의 알바생 양'은 이제 다음 주가 되면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납니다. 귀국시기는 미정이고요.
작년 연말 즈음해서 "내년엔 나도 바쁘게 살 것 같으니 괜찮아요. 그러니까 1년 안에 돌아오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라고 눙쳤던 기억이 납니다만은 어쨌거나 뭐, 일단은 그렇게 일단락 되겠지요.
딱히 공식적인 연인관계로 발전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는 마음을 쏟았던 사람에 대한 예의로 동시다발적으로 다른 이성과의 관계를 진전시킨다거나... 하는 보험 내지는 어장관리를 하지 않는 쓸데없는 주의라서,
이제 곧 물리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완벽한 FA 상태가 되겠지요. 음. 벌써부터 좀 허전해요.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재미있는 부분을 찾아내 몰입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본질을 '유희적 인간'이라고 규정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성과의 교감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죠. :)
2.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사람이 과거에 천착하게 되는 건 '그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이라는 생각을 쭉 해왔어요.
그래서 문득문득 과거의 좋았던 기억들이 떠오를 때ㅡ특히 심적으로 힘들 때ㅡ에도 의식적으로 거기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쓰곤 했습니다.
이게 무슨말이냐 하면, 술 혹은 새벽 공기에 취해서 뜬금없이 핸드폰을 꺼내 '자니?' 혹은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같은 금단의 주문을 시전하는 일이 드물다는 거지요. :)
뭐, 저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만났던 분들에게서 종종 먼저 연락이 오곤 해요.
이를테면 자려고 누웠는데 '잘 지내지? 보고싶다.' 등의 스탠다드한 카톡이 오거나, 조금 일찍 결혼한 첫사랑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부부생활에 대한 시시콜콜한 푸념을 들어주거나,
아니면 대낮에 뜬금없이 '오빠네 집 근처에 KFC 생겼더라, 오빠 타워버거 좋아하잖아.' 하는 것들이지요. 요시! 그란도시즌! 이제 버거킹만 생기면 완벽해요! 오오 버거왕 오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코끼리'이듯, 역시 뭔가를 저질러 버리는 것보다는 참는 게 더 힘든 법이라 이게 은근히 지치는 일이기도 하고,
어느덧 저도 나이를 꽤 먹어서 뭔가 인생이 하루아침에 극적으로 바뀔거라는 생각은 애저녁에 접었지만 연예인으로 데뷔한다거나, 라이징오의 파일럿이 되어 지구를 구하는 초딩이 된다거나...
그래도 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정말 사소한 것일지라도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거라고 믿는 편이 좋은 일 아니겠어요?
3.
저의 마지막 연애는 공식적으로는 오늘로부터 1년 3개월, 비공식적으로는 5개월쯤 지난 일이네요. 왜 두 개가 나뉘는지는 이 바낭에서 중요하지 않으니 일단 퉁치고 넘어가고,
아무튼 그 '공식적인' 마지막 연애를 시작하기까지 저에겐 약 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 어째서 '미친 사랑'이 동어반복인지 뼈저리게 느낄만큼 지독하고 자기파괴적인 연애를 했거든요.
왜, 하루키의 <잡문집>에 실린 결혼 축사에도 나오잖아요.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나도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로 시작하는...
제가 그려낼 수 있는 모든 상상들을 그대로 빚어낸 듯한 그 사람과의 연애도 그랬어요. 요즘 유행하는 말투로 넘나 행복한 것이었어요. 다만 그만큼 나쁠 때는 아주 나빴을 뿐이지요. 정말 더럽게 나빴어요.
뭐라고 해야하나. 저와 거의 모든 부분에서 가치관과 감정을 공유하고, 또 이해하는 사람과 다투는 건 마치 실전 무술의 달인과 싸우는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유효타라서
이 사람이 꼭지가 돌아서 나를 엿먹이려고 작정하면 정말 답이 없었지요. 그 때마다 음, 뻥 좀 보태면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 때의 경험은 제게는 이아고의 가면같은 거였죠.
4.
어...음 글이 길어지네. 이번에는 마지막 연애 이야기를 해볼까요.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아무튼 마지막 연애의 끝은 전적으로 제 잘못이었어요.
그래도 변명을 좀 하자면,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면서 인생의 청사진이 완벽하게 작살나버리고 난 뒤에 급하게 수립한 플랜B로 석사과정을 막 시작했을 때였는데, 그 때는 도무지 마음의 여유가 생기질 않았거든요.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초조하고, 뭔가에 쫓기는 듯한 날들이라 평소였다면 웃고 넘길만한 문제도 다툼으로 발전해버리고, 또 평소였다면 신경썼을 부분에서도 종종 주의력을 잃곤 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면을 벗기 위한' 4년이라는 시간조차 부족했었던 게 결정적이었어요. 처음에는 괜찮아졌다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저에게 보여주는 순수한 호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그것에 대해 대놓고 의심하거나 한 적은 없던 것 같지만, 저는 감정을 잘 숨기는 타입이 아닌지라 아무래도 썩 자연스럽지는 않았을테지요.
5.
물론, 그래도 불안하긴 해요. 신중해질 필요가 있어요. 한 번으로 끝나는 건 괜찮지만 '두 번째'라는 친구는 첫 번째와 세 번째를 암시한다잖아요?
만약 또 삐끗해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게 된다면 '아,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스스로 체념하게 될테고, 그건 또 싫거든요.
제가 정말로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가 택한 방법은, 제가 사는 세계와 접점이 없는 다른 누군가와 소통하는 거에요.
원체 성격이 제멋대로인 편이라 상호 존중과 적정 선의 예의를 지키는 건 항상 어느 정도의 주의를 요구하고, 일정 이상의 텐션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건 저에겐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이렇게 듀게에 바낭을 끄적이는 것도, 또 이 곳을 통해 알게 된 독서모임에 가입해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어요. 지금이야 뭐 최초의 이유쯤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만큼 나름 즐겁지만 :)
아직까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므로 패스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어서 내심 뿌듯해요. 뭐 인생사가 다 그렇듯 제가 준비가 되어있다고 해서 누굴 만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서도
그래도 뭔가를 기대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니까요 :)
읏샤. 글로 인사드리는 건 간만이네요. 잘 지내고 계신지요 ㅎ_ㅎ
듀게 눈팅은 꾸준히 하는지라 얼마 전에 마음 가는 분이 생겼다는 글 쓰신 걸 봤었어요.
저의 비루한 글을 즐거이 읽어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인데, 생각지도 않게 제 사고방식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니 더더욱 기뻐요 :)
역시 진정한 간지는 어깨에 힘을 뺀 자연체에서 나오는 법이지요. 그 분과의 관계도, 그와 동시에 진행중인 다이어트(...)도 모두 좋은 결과 있길 바라요.
별 거 아닌 바낭이지만서도 저에게는 이게 일종의 연습인지라 아직은 글 하나 끄적일때마다 심력 소모가 워낙 커서... 그래도 꾸준히 노력해서 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