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단골 카페의 예쁜 알바생에 대한 마지막 후일담.

(이 글은 저의 지난 바낭들을 읽은 후에 읽으시면 더욱 재미...까지는 아니고 이해하기에 편하실 듯 합니다.)

1.
신촌 모처에 작은 방이 하나 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아버지의 '작업실' 이지만, 최근 몇 년 간은 아버지의 부부싸움 후 피난처로 가끔 사용되거나
제가 가족들 몰래 구매한 물건들을 임시로 보관해두는 지름신의 성소, 아니면 데이트 장소로 이용하거나  라면먹고 갈래?  하던...
어쨌거나 본래의 목적과는 꽤나 동떨어진 용도로 쓰이는 '노는 공간' 이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작년 말부터 거처를 그 쪽으로 옮기고 본가(...라고 해봐야 차로 20분 거리)를 오가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 1년 남짓한 시간동안 여기서 꾸역꾸역 졸업도 하고, 자격증도 몇 개 챙기고, '자소설'을 넘어서는 위인전을 집필하고...뭐 그런 일들이 있었지요.

혼자 살면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외로움보다는 '심심함'이었어요. 
아, 물론 전쟁 중에도 티타임을 즐긴다는 영국군처럼 그 와중에도 취미생활은 꾸준히 즐겼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생각하는 데 사용하다보니 대화 그 자체에 굶주리게 됐다고 보는게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마일드 세븐 팩 주세요." 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말고는 당최 하루종일 입을 열 건덕지가 없었거든요.



2.
그래서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들, 그리고 알바생 양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은 그 자체로 무료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자 자극이었어요.
그게 어쩌다보니 음... 이전의 글에서 끄적였듯 정말 충동적인 결심으로 그걸 실행으로 옮겼고 또 현재진행형이 됐지요.
관계라는 건 어찌됐건 두 사람의 문제이니, 더 이상은 제가 함부로 쓰긴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분께서 이 글을 볼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여겨지기는 합니다만,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작성한 글은 그것이 설령 바낭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또 정말 감사하게도 듀게의 많은 분들께서 격려해주셨고, 후일담을 기대한다고 말씀해 주셔서 간략하게나마 후일담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제목에 굳이 '마지막'이라고 적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3.
지난 주에 첫눈이 왔지요. 원래 그런 쪽으로는 둔감한 편이기도 하고, 또 제가 사는 곳에는 눈이 그렇게 많이 안 오길래 다른 약속을 잡았어요.
좋은 분들과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생각보다 모임이 일찍 끝나서 밖에 나왔더니 함박눈 수준으로 눈이 펑펑 내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걸 보고 있자니 술도 적당히 먹었겠다, 호승심이 동해서 패기 넘치게 전화를 걸었어요. 

"눈이 펑펑 오네요. 우리 만날래요?"

...첫 만남 이후엔 카톡으로만 연락해서 통화는 처음 하는 거였지만... 하하하; 알콜의 힘이란 위대하지요. 소주 1승 추가
어쨌거나 약속을 잡고 부랴부랴 약속장소로 이동했는데 도착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눈이 뚝 그쳤더라고요. 실망감 반 미안함 반으로 기다리는데
그 분이 코트에 빨간 목도리를 칭칭 감고 저 쪽에서 종종걸음으로 걸어오시더라고요. 저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눈이 그쳐서 당황한 것 같았어요.

서로 괜히 머쓱해서 어...음... 하고 어버버버 하고 있는데 그 분이 "저기, 이거..." 하면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어요.
따끈따끈한 쌍화탕이랑 감기약이었어요. 제가 첫 만남 때 뜬금없이 심한 감기에 걸려서 계속 콜록거렸던 게 못내 마음에 걸렸나봐요.
전형적인 유아 입맛이라 이런 건 사탕 없이는 못 먹는데 짐짓 태연한 척 환하게 웃으면서 쌍화탕을 원샷하려니 힘들었지만 내심 기뻤어요.

그 분은 그런 저를 보고 배시시 웃더니 "눈이 그쳤네요. 어떡하죠?" 라고 물었어요.
그 때 깨달았죠. '아...뭐할 지 생각도 안 하고 다짜고짜 저질러버렸구나.' 소주 1승 취소
그나마 만나기로 했던 곳이 평소 익숙한 홍대라서 다행이었지요.  잠시 패닉이 왔다가 둘 다 꾸미는 걸 좋아해서 패션이나 액세서리같은 얘기가 잘 통했던 걸 겨우 떠올리고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옷 구경도 하고, 타로점도 보고, 친구가 매니저로 있는 노래방에 가서 노래도 불러주고 하면서 재밌게 놀았어요.



4.
딱히 음악을 전공했다거나 업으로 삼고 있는 건 아니지만, 서로 알아가는 단계에서는 서로의 음악 취향을 아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노래를 듣고, 어떤 정서에 공감하는 지 아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본질에 얼마간 가 닿을 수 있지 않나... 해서요.

그래서 지난 주말에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주로 어떤 취향의 음악을 좋아하는지 물어봤어요.
딱히 음악을 가려듣는 편이 아닌데, 노래방에 갔을 때 그 분이 부르던 노래들은 희한하게 다 처음 듣는 거였거든요.
아무튼 그래서 다섯 곡씩, 서로가 가장 많이 듣는 노래를 쪽지에 적어 교환한 후에, 다음에 만날 때 감상을 얘기하기로 했어요.
그 분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그 노래들을 들으며 집에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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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곡 모두 평소였으면 시도조차 못 해봤을 말랑말랑하고 감성적인 노래들이었는데, 그래서 더 좋았어요.

앞으로도 이 노래들을 들으면 환기되는 정서들은 모두 다 그 분과 관련된, 그 분을 향한 것들일테니까요. :) 어우, 쓰다보니 낯간지럽네...




5.

이번 주의 어느 날, 평소처럼 카페에서 공부도 하고 열심히 일하는 알바생 양을 흘깃흘깃 구경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그 분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짐을 정리하고, 함께 카페를 나왔지요.

바래다주는 길에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내어서 빠른 시일 내에 언젠가는 해야했을 말을 꺼냈어요.


"크리스마스 때 뭐해요? 별 일 없으면 밥이라도 한 끼 하시죠."


평소처럼 배시시 웃길래 내심 안도했었는데,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보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머뭇머뭇하면서도 담담하게 꺼낸 그 분의 말은 대략 이런 거였어요. 


크리스마스 때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말해주어서 기쁘고 고맙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할 말이 있다.

고등학교 때 착실히 공부해서 원하는 전공의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힘들었다.

그래서 마음도 정리하고 식견도 넓히고 싶어 유학을 결심하고 휴학을 했고, 내년 1월 말에 출국한다...

만나는 동안 이걸 숨기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처음 번호를 달라고 했을 때 아예 거절했거나, 아니면 좀 더 빨리 말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제 표정이 어떘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워낙 표정관리를 못 하는 편이라서...

겨우겨우 웃으면서 한 마디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 그래요? 아쉽네... 가기 전까지 나랑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재미있는 것도 많이 보고, 즐겁게 놀아요."




6.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인지라, 지금도 카톡하고 통화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분명히 꽤 충격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까지는 제가 먼저 연락을 끊을 생각도 없고, 그건 그 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요.

처음부터 '웃는 모습이 보고싶다. 미소, 미소를 보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연애감정으로 발전하기에는 아직 오래되지 않은 일이라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요.



드라마처럼 공항에서 떠나는 여자를 붙잡고 '가지 마!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라는 로맨스를 꿈꾸기엔 

항공권 당일 취소 위약금을 고려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성숙(?)해서 언감생심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지만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그냥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즐겁고 소중한걸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섹시한 겨울 되세요.


    • 첫눈오는날 넘 예쁜 데이트하셨다 해서 엄마미소로 읽구 있었는데.. 반전이있네요ㅠㅠ 꼭 연인으로 발전되지 않는다고 해도 쏘딩님이나 여자분에게 모두 좋은 추억이 될수 있을것 같아요 ㅎㅎ (근데 왜 이렇게 글을 잘쓰세요? 적절한 대사와 묘사와 캐릭터조형술?까지... 웹소설 작가에 도전해보셔도 좋을듯!:-)) 

      • 말씀하신 대로 요 몇 주동안의 추억만으로도 당분간은 꽤 행복할 것 같아요 !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더없는 기쁨이네요. 감사합니다 :)



    • 글 잘쓰시네요. 제가 다 안타깝습니다.

      • 전에 썼던 바낭들에 격려 댓글 남겨주신 거 기억하고 있어요. :)


        Happily ever after같은 결말은 아니지만... 두 달정도 남은 시간동안 즐겁게 보내면 스스로가 납득할만한 결말이 나지 않을까 하고 있네요 헤헷;

    • 아 내심 응원하고 있었는데 너무 아쉽네요...남은 시간 소중히 하시고...또 아나요 나중에 인연이 될지 :)
      • 헤헷 감사합니다 !


        좋은 소식으로 또 지금 썼던 것과 같은 주제로 바낭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 서로 깨알같이 신경 쓰고 배려하려는 마음 씀씀이들이 어른스럽고 이쁜 커플이네요. 인연이 어디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맣게나마 축원하는 마음 한조각 드립니다.

      • 가슴이 따뜻해지는 댓글이네요. 감사합니다 ㅜ.ㅠ 

    • 기다렸던 1인 왔습니다. 유학이라니 ㅠㅠ) 그러고보니 저도 괜찮은 인연들이 제가 유학가기 전에 왔던 기억이 나네요. 흐음.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지 않으실거 같아서 일단 부러움 1 추가 드립니다. 1월까지 재미있게 노시는걸로!

      • 앗 오셨군요 :)

        연애소설 쓰드끼 좀 달달하게 써보려고 했는데 마지막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망한 듯...ㅜ.ㅠ


        하아 크리스마스에 데이트라니 좋긴 하지만 생각할수록 돈 내고 벌받는 기분이라 갑갑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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