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휴일

뭐 하자고 새벽부터 눈이 뜨여서 출출 거리며 밖으로 나갔더니, 편의점에 한 때 산삼마냥 존귀한 분이셨던 허니버터칩이 무심하게 쌓여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기쁜 마음에 한 봉지 집어서 냉큼 뜯는데 기분이 묘합니다. 마치 천신만고, 삼한땅까지 흘러들어 불로장생의 영약을 품에 안았건만, 실상 시황제는 진작에 죽어 자빠졌고, 천년왕국은 바람앞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는 것 풍문에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옛 진나라의 신하가 된 듯한 기분이었지요.


버터칩의 맛은 달짝, 짭잘 묘했습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이게 그렇게까지 품귀현상을 빚고, 공장 관계자가 빼돌려서 팔 만큼 대단한 물건인가? 그래도 앞다퉈 구하러 다니던 시절에 봉지를 뜯었다면 가 일층 맛나게 느껴졌겠지요? 없이 살던 시절에 연애했던 그 분도 말로는 그런 거 관심 없다고 해 놓고, 금붙이를 사다 끼워주니 눈물까지 보이셨지요. 새벽 바람에 깔깔이 입고 편의점 앞에 앉아 과자에 맥주를 까고 있으니 지나가던 비둘기가 반갑게 인사 해 줍니다. 


아침에는 정독 도서관에 사진 찍으러 갔습니다. 제가 그 동네를 처음 알았던 때에는 동네 할마씨들만 한가하게 얘기 나누시던 조용한 동네였는데, 이제 그 호시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때는 하루 중 아침이 유일합니다. 만두가게가 된 그 자리, 화개이발관에서 머리도 자주 잘랐지요. 문 닫으시기 전, 마지막으로 머리 자르러 갔을 때 아저씨(라지만 그때 이미 여든이 넘으신)께선 무려 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머리를 다듬고, 또 다듬으셨어요. 원래는 일 봐주시는 아주머니께서 머리를 감겨 주시는데, 그 날은 웬 일인지 손수 그 억센 손으로 벅벅. 수건으로 탁탁 털어서 말려 주시며 슬쩍 하신 말씀 "이제는 학생 머리를 잘라주지 못 하게 되었어."


마지막 이발비를 한사코 마다하시며 해 주신 말씀. "뭘 하든 된다는 생각을 하고 열심히 살도록 하세요." 그 얼굴과, 손길과 목소리는 아직도 눈 감으면 생생한데, 이제 아저씨의 이발도구들은 민속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옮겨져서 괴이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어요. 박물관 연구사들은 왜 그 모습 그대로 옮기지 않았을까요? 화개이발관이 화개이발관인 줄 모르는 아이들이 그 낡은 이발 도구들을 요로케 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서 주책맞은 아저씨처럼 마구 떠들고 싶어집니다. 얘들아, 저게 아니야... 아무튼... 저게 아니야. 재현된 박물관의 그 이발관에는 삼육두유 쪽쪽 빨아 드시던 아저씨가 안 계세요.


도서관에 들어가 물레방아 앞에 앉아 있는데, 웬 고릴라 같이 덩치가 큰 외국인이 저를 보고 말을 겁니다. 기술이 빨리 발전해서 드래곤볼의 스카우터 같은 게 개발이 되어야 합니다. "호오! 당신은 영어실력이 고작 30이군요." 하면서 상호 편하게 될 테니까요. 말은 또 어찌나 많은지, 왜 캐논 카메라를 샀냐? 자기는 이러쿵 저러쿵 해서 온리 라이카를 쓴다는 둥, 하여간 장비부심은 인터내쇼날한 현상인가 봅니다. 도무지 못 알아먹겠는 라이카 카메라의 우수성에 대해 얘기를 듣다가 고릴라가 말 했습니다. "나는 서울을 여행하고 중국으로 간다. 너는?" 저는 엉겁결 더하기 짧은 영어에 그만 "나도 서울을 여행하고 있어." 라고 말 해 버렸습니다. 미친거죠. 고릴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습니다. "어디 출신이니?" 저는... "...서울" 하고 대답했습니다. 서울?


오늘 하루종일 영어공부 했습니다. 영어 반드시 잘 할 겁니다. 이 XX놈의 양키 새퀴들. 다 죽었어.




    • 한창 난리가 났을 때 두봉 먹어봤고,

      요즘은 물량이 좀 풀렸는지 여기저기 보여서 몇봉 쌓아놓고 심심할 때마다 먹는데요,

      난리 났을 때보다 요즘이 더 맛있게 느껴져요.

      구할 수가 없으니 더 맛있어야 한다는 저항심리가 사라져서 그러려나요.
      • 맛있어요. 못 만든 스낵이 아니에요. 허니버터칩이 사람이라면 얼마나 억울할까 싶기도 해요. 인기 있었던 게 내 탓이냐? 하면서.

    • 아 저는 한참 품귀일때 조금 맛본 허니버터도 별로 맘에 안들었어요. 혀가 아리더라고요. 다행이죠. 남들이 다 좋아하는 것을 나는 싫어한다는 것이요.

      • 남들 다 싫어하는데 저만 좋아해서 사단이 난 적도 있어요. 다들 군대리아를 싫어하는데, 저만 엄청 좋아해서 금요일, 일요일에 근무 마치고 오면 제 관물함에 햄버거 빵이 수북이... 

    • 막줄에서 크게 웃었습니다. 정말 그 심정 이해됩니다.


      저는 얼마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황태자 ( 마리 앙투아네트 큰 오빠랍니다.) 둘이서 너무나도 다정하게 꼭 손을 잡고 그린 초상화가 있어서 이게 그 사람들이 맞나? 아닌가 긴가민가 하다가 ( 아버지뻘인 대왕이 너무 젊게 그려져 있어서 말이죠;; 아무리 봐도 형님이나 막내삼촌 포스라) 안되는 영어와 독일어 때문에 그 초상화 알아보느라 엄청 고생한 적이…ㅠ ( 이럴땐 정말 궁정화가들 욕하고 싶단 말입니다. 주군을 엘프로 그리는것 까지는 이해하겠는데, 20년씩 젊게 그리는건 정말…;;)


      참고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연구관들을 학예사라고 한답니다. 큐레이터라고도 하구요. ( 안내하시는 분들은 도슨트)

      • 욕 하지 마세요. 그 양반들이라고 목이 두 개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살려고가 아니라, 정말로 살아남으려면 영구같이 생겼어도 강동원처럼 그려야지요. (일자무식이지만) 램브란트 야간순찰만 봐도, 그거 돈 낸 양반들 다 그려줬다는 소문도 있잖아요. 램브란트가 시봘시봘 거리면서 포토샵 단축기 눌렀다면, 궁정화가들은 덜덜덜 떨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메뉴 하나하나 마우스로 콕콕 

        • 정말 그렇군요…절대왕정 시대의 궁정화가들이란…>.<
    • 서울이 얼마나 넓은데요.. ㅎㅎㅎ



      여행 잘하세요!!!

      • 어렸을 때는 깔깔 거리면서 버스타고 종점에서 종점으로 다니기도 했는데, 이제 늙고 지쳐서 영화도 동네 극장에 안 걸리면 온라인 풀리는 날만 눈 껌뻑이며 고대하는...

    • 내 인생은 여행이다라는 선언같아서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영어실력의 부족이라니 낭만이 와르르ㅋ

      이발소처럼 우리도 언젠가 박물관에만 남는 존재가 될까요,아니 박물관에라도 남는다면 행운이려나
      • 인생은 여행이라니요? 이 보세요, 다섯 걸음만 걸어도 이불펴고 눕고 싶은데... ㅎㅎㅎㅎ

    • 품귀현상이 생길 정도로 인기 끌기 직전, 집에 한 봉지가 있길래 뜯어서 딱 두 개 먹고 안 먹었어요; 너무 달고 느끼해서-.- 그래서 허니버터칩 열풍에 어리둥절... 그러다 엊그제 슈퍼 갔더니 허니버터칩이 수북하게 쌓여 있길래, 유사품(허니통통 등)인가 싶어 크게 눈 뜨고 다시 봐도 허니버터칩이더라고요. 이제 열풍이 지나간 건가...
      • 일단 뜯었으면 위장에 우겨넣어 기어코 똥으로 뱉어내야 합니다. 이런 갑부를 보았나!!! 

    • 여행을 하듯이 사는 것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서울 살면서 가끔 우리 동네든 다른 동네든 여행온 기분으로 돌아다니곤 했어요. 


      정독도서관과 삼청동길이 그립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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