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관한 낙서

하나.
관계는 동행에 다름 아니죠. 관계를 맺어 나란히 걷는 동안에는 이런저런 우연의 일치들이 찾아와주곤 합니다.  내가 어제 보거나 느낀 '이야기'들을 오늘 '그/그녀'가 맥락도 없이 꺼내곤 하는 식이죠.  그런 순간들은 생의 비의가 한꺼풀 벗겨져 드러나는 듯한 느낌으로 짜릿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끝나갈 때는, 어제 이해했던 것들조차 막막해지고 오해 또한 너무도 쉬워집니다. 동행의 약호를 버리고 상식의 언어로 퇴각하여, 매순간 멀어지는 별과 별처럼 대화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리는 캄캄한 밤하늘의 어둠 속에 홀로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관계의 기억'이 또 하나의 새로운 별로 어둠 속에서 돋아나.... (던가 어쨌던가)

둘.
관계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둘 사이에 자주 빈 순간이 생겨나지 않던가요?  할 말이 없다기 보다는, 지금은 이 말을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 말이에요.  그래서 상대가 마련한 침묵의 흡인력에 호응하여 - 혹은 배려하듯- 그 진공의 규격에 맞는 무표정만 지어보이는 일이 잦게 됩니다.  그런데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일이 항상 편안한 것 만은 아니죠. 그의 침묵과 내 침묵이 날카롭게 부딪혀 낯설거나 과도하게 진지한 풍경이 열리는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당황하면 안 돼요.  그저 만들어진 침묵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들여다 볼 일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관계에는 관계를 매개하는 상황이나 의식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매개는 자연스러워 자각되지 않지만, 매개의 매개성이 황황히 노출되는 경우도 있어요.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그것도 관계의 한 풍경이죠.  풍경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것도 풍경이 갖는 매력의 한 부분이에요. 혹시 관계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도, 기껏해야 불편하거나 실망하게 될 뿐이죠.  그 괴로움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침묵하고 싶으면 침묵해야죠.  오직 그 침묵만이 우리를 말에 이르게 할 것이니까요. 자유로운 호흡과 내부로부터 우러난 리듬으로, 너무 빠르지 않게, 너무 느리지도 않게 침묵해야죠. 어쩌면 우리는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기회를 맞아 또 하나의 숨쉬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셋. 
어느 날, '그/그녀'가 나에게 자신을 보아주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기꺼이 '그/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충분히 내 안에 머물렀으며, 나 아닌 방향을 향해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거든요.  조금씩 거리가 좁혀가는 중에 홀연히 '그/그녀'가 사라져버리는 날이 오기도 합니다. 그 빈 공간 너머로 미로 하나가 나타나죠.  가로등이 있어도 그 미로는 캄캄한 어둠입니다. 불빛을 받아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담장들은 아무도 기대지 않는 낡은 은유처럼 적막합니다.

어느 날, '그/그녀'는 다시 내게 자신을 보아줄 것을 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 젓습니다. 그리고 망각을 위하여 그의 손으로 내 손을 뻗어봅니다. 그러면 이제 내 눈엔 1만 km는 떨어져 보이는 그를 향해 나의 바다가 밀려갑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육지라는 좌절이고 내 안에서 출렁이는 건 평화로운 바다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흩어져야 할 것들은 길을 모르고, 밤하늘에는 또 새로운 별이 돋아납니다.
    • 별이 보고 싶어지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마음의 미로는 그리 이어지는거 같네요.


      여러 전달의 느낌이 좋아 달리 붙일 말은 없네요.


      방금 복잡한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 답글 달 생각도 안했을텐데,


      정신과 육체도 좀 쉬려고 잠시 놓아주기 마련이어서요 진통제 같이,그런거보면 저 두개가 내것도 아님.

    • 좋은 글이네요.


      학교다닐때 강의 시간에 들었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아니하다.."


      제가 주변인들과 관계를 맺을때 느끼는 것도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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