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모리아
동부간선도로를 달리는데 택시 아저씨께서 "손님, 경음악 좀 듣겠습니다." 하더니 테잎 하나를 데크에 넣으셨어요.
오! 기억속에 아련한, 촌스러우면서도 촌스럽다는 표현이 왠지 불손한 멜로디. 폴 모리아 악단의 메들리였어요.
정직한 관악기와, 부끄러움 모르는 신시사이져, 너네만 줄달렸냐? 전자 베이스의 전국노래자랑적 호들갑.
Love is Blue 를 지나 Isadora, Toccata 를 들으며 창밖으로 흐린 하늘을 보는데,
왠지 스카프로 머리를 감싸고 나비 썬그라쓰 낀 채 세느강변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젖어들고만 것이죠.
혹은, 150원짜리 관제엽서를 사다가 사연을 적어, 단풍잎도 하나 붙여서 오미희 씨 프로그램에 보내야 할 것 같은...
폴 모리아 악단의 음악은 촌스러운 듯, 촌스럽지 않아요. 희한하죠. 오그라들던 손으로 박수를 치게 만드는 이상한 아저씨.
예체능계에서는 특히 학벌이 곧 실력은 아니지만, 이 아저씨 마르세이유 국립 음악원 출신의 엘리트더라고요.
자기 이름이 붙은 악단을 이끌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공연을 하던 폴 모리아 선생,
Love is Blue 로는 빌보드 1위도 했고, 말년에는 훈장도 받으시고, 이천년대 중반에 급성 백혈병으로 별세.
마지막까지 정력적으로 공연을 다니시다가 몸이 좀 피곤하여 들른 병원에서 급성 백혈병 진단,
한달이 조금 안 되는 짧은 기간동안 투병을 하다가 가셨으니, 황망한 죽음이기도 하고, 복 받은 마지막이기도 하고.
작품을 들으며 느껴지는 희한하고 복잡한 감정은 공연실황을 보면, 가 일층 난잡해집니다.
정장을 갖춰입은 오케스트라 사이에 전자악기가 섞여 있는 건 팝스 오케스트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Penelope 같은 작품이 연주될 때는 쫄쫄이 에어로빅 복장을 한 남녀가 오케스트라를 뒤에 두고 현대무용을 합니다.
카메라가 객석을 비추면, 관객들은 그 아스트랄한 무대를 100분 토론 보는 표정으로 감상하고 있고,
흰 턱시도를 입은 폴 모리아 씨는 뒤에서 분홍색 쫄쫄에 헤어밴드 한 무희들이 좌방향 연속 5회전을 하는데,
그 우아한고도 경박한 몸짓으로 지휘를 멈추지 않아요. 알아요, 그 마음. 뒤돌아 보면 끝장인 거죠.
쫄쫄이 입은 무희들이 손을 흔들며 퇴장을 하면, 모리아 선생, 갈채 쏟아지는 객석을 향해 거만하고도 격식을 갖춘 표정으로 절을 해요.
그 모든 과정이 너무 진지해서 배잡고 깔깔깔 웃다가도, 저도 모르게 일어서서 저승의 폴 모리아 씨에게 박수를 보내는 거죠.
폴 모리아 악단은 "모짜르트 메들리", "콘돌은 날아가고" 뿐만 아니라, "Let it be", "돌아와요 부산항에" 에 이르기까지
괜찮다 싶은 작품이 있으면 국경, 장르, 시대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편곡을 해서 무대에 올렸어요.
늘 무표정한 현악기 주자들과, 늘 신나있는 전자악기 주자들, 늘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카 퍼레이드 하듯 방긋 웃는 싱어들
그리고 콧수염 아래 하악을 언제나 상방 15도 정도 들어 올린 채 2/4박자로 바람에 날리는 허수아비처럼 휘두르는 그의 오른손.
백남준 씨가 예술은 다 사기라고 말 했다고 하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남준 씨는 예술을 사랑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도 20세기를 불 싸지르고 간 아티스트 중에 머리칼 한 올 만치라도 더 예술을 사랑한 사람이 있다면 폴 모리아 씨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전 세계를 발바닥 고무탄 내 나도록, 음악을 찾아 어슬렁 거렸던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아.... 가을.....
러브 이즈 블루, 타계하셨군요.
80년대에 나온 걸로 추정되는 폴 모리아의 LP 전집이 아버지 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어요. 90년대나 2천년대에 연주한 레퍼토리는 없지만(돌아와요 부산항에도 없음) 70년대 전성기 시절의 웬만한 경음악 히트곡들은 다 들어 있어요. 같이 들어있는 책자를 보니까 유명한 프랑스 영화 음악도 많이 있군요. 어렸을 때에 아버지가 틀어놓은 걸 옆에서 같이 들었고 몇 곡은 악보 사다가 피아노로 뚱땅거렸어요. 그 시절엔 집에 엄청 사운드가 빵빵한 대형 오디오 세트가 있었는데 지금은 휴대용 턴테이블조차 없어서 못듣겠네요...
위대한 사랑이란 곡을 제 나이 만 다섯살에 라디오에서 듣고 통곡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슴을 쥐어짜는듯했던 기분이 지금도....
근데 지금 들으면 걍 청승...슬픈내용인거 같은데 제목은 위대한 사랑이라니..그동안 이 곡 제목을 형제..로 알고 슬퍼해온 저는 어이상실. ㅎㅎㅎ 묘한 악단이에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