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바낭) 국정 교과서 썰

진열대에서 집어 들면서도 '들을 일 별로 없겠다' 싶었던 음반들이 있어요.

일단 꽂히면 화살이 되고마는 십대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이기도 한데, 개중 하나만 꼽아 보라면 안치환 씨의 민중가요 모음집이죠.

"노스텔지어(?)" 라는 타이틀로 출시 되었는데, 독재가 독재이기에 독재라고 하여도 누구하나 그것이 왜 독재냐고 반문하지 않았던,

돌이켜보면 참 상식적이었던 시절 90년대 말. 거기 수록 된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노래들은 생경하면서도 좀 시시했죠.


그런데도 굳이 구입을 했던 건 풋내기의 역사적 사명의식 같은 거였어요. 

이걸 보전해서 내 자식에게 들려줘야 한다!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걸 배우는 게 아니라 느끼게 해 줘야한다!

그때야 알았나요? 유튜브라는 게 덜컥 생겨버릴지. 게다가 비교적 호시절이라 민중가요 따위 곧 화석이 되버릴 줄 알았죠.

그러니 2008년에 제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습니까? 촛불을 들고 아침이슬을 부르는데, 정말이지 기가 막히고 열불이 나고...


간만에 레코드 가게에서 씨디를 샀어요. "이글스 베스트" ㅎ 

지난 여름에 엄니랑 같이 있을 때 Desperado 를 틀었는데 엄니가 눈이 동그래져가지곤 "이게 무슨 노래야?" 하더라고요.

당황했죠. 세대로만 본다면 저 보다는 엄니가 "이글스" 에 가까울테니 말이죠.

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 했어요. 엄니, 이글스 데스페라도. 저거 엄니 20대에 나온 노래잖아 


엄니가 심드렁한 얼굴로 그러더라고요. 먹고 살기 바쁜데 내가 팝송 찾아들을 시간이 있었간디?

저희 부모는 이른바 세시봉 세대에요. 야유회에선 박수를 치며 포크송을, 

아빠 사진첩 속에는 휴대용 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친구들과 게다리로 트위스트를 추는 젊은 아빠의 모습도 있죠.

그런데 두 분은 동시대 세시봉과는 동떨어진 인생을 살아야 했어요.


무교동에서 "대학생의 밤" 이 열리던 그 시각에 아빠는 얼굴에 검뎅이 칠하고 강원도 전선지대에 엎드려 있었고,

상고를 나온 엄니는 변두리에 있는 직장에서 특근하고 돌아와, 지각벌금 물지 않으려고 심야 FM은 꿈도 못 꾸고 살았대요. 

분명 같은 나이,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았던 사람들인데, 어떤 이들은 번안곡이 불리는 라이브 무대 앞에서 소리를 질렀고,

어떤 이들에게 청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가요무대에요. 저는 세시봉 세대라는 말을 혐오합니다.


대학 때 노회찬 씨 지역구에서 자취를 했어요. 노회찬 씨의 말마따나 과일값이 싸고, 그만큼 방세도 싼 동네였죠.

노회찬 씨가 영화배우 아들에게 패배했던 그 해 선거에, 저는 현장에서 "서민" 들의 민심을 귀로 들었어요.

그리고 저도 투표소에 들어가 잠시 갈등을 했어요. 이해가 안 되시죠? 왜 갈등을 해? 당연히 노회찬 아니야?

그런게 그게 갈등이 되더라니까요. 신기하죠?


국정교과서를 청와대와 여당은 이념 문제로 몰고가는 모양이죠? 그런데 오늘 버스에서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어요.

할배 두 분이 조곤조곤 얘기를 하시는데, 밝고 긍정적인 얘기를 해야지, 왜 자꾸 구질구질한 얘기를 가르치려 하냐시더군요.

끼어들어서 하고 100분 토론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소심해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노회찬 의원이 정말로 아깝게 패했었던 선거 결과가 떠올랐어요. 


웹에서 사람들이 쉽게 비웃는 것처럼 변두리의 홍정욱 의원에게 표를 던진 "서민" 들은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어요. 정말로 지역을 위하는 길은 노 의원을 지지하는 일이란 걸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홍 의원을 지지한 거에요. 연줄도 있고, 돈도 만져 본 경험도 있고,

무슨 일이든 벌이다 보면 부스러기라도 얼마 떨어지지 않을까? 좋은 제도와 사업도... 알고 챙겨 먹는 사람들의 몫이죠.


그런데, 할배들은 그 역사를 다 겪어서 아는 분들이기에 그 역사가 구질구질했다는 것도 아시는 거잖아요.

노원구의 주민들도 그곳에서 살아서 알기에 홍정욱 씨를 지지할 생각도 품게 된 거고요.

역사 왜곡이니, 아버지에게 바치는 제물이니 하는 말은 제쳐두고라도,

우리 아이들이 우리나라의 근현대에 벌어졌던 일들을 민낯 그대로 배우게 하는 것이 어른들이 할 일 아닌가 해요.


그래야 판단을 할 테니까요. 구질구질해서 싫든, 유공자들은 몰락하고 부역자들은 영화를 누리는 괴상한 나라든 

그게 우리나라니까. 세시봉에서 한 줌의 청춘들이 낭만에 젖었던 밤에, 한 부대의 청춘들은 세시봉이 뭔지도 몰랐고,

80년대 대학생들은 무용과도 돌을 던졌다고 말은 하지만, 80년대만 해도 대학생들은 선택받은 인생들이었다는 것.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외조모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데, 누구는 전범국가에 비행기를 헌납했다는 것. 모조리 다.


다음 대선에서 낙승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질 거.... 같죠?

교과서는 엉망인 채로 아이들 책상에 놓일 테고, 우리는 또 패배할 거에요. 지금까지 쭉 그래왔듯이.

밴드 이글스는 1973년에 Desperado 를 발표했어요. 그리고 저희 엄니는 지난 가을에 그 노래를 알았고, 

지금 그녀가 좋아하는 버젼은 다이애나 크롤의 리메이크에요. 오늘 구입한 이글스의 씨디를 가져다 주면,

아마 저는 돈이 썩어나냐고 등짝이나 얻어 맞겠죠? 주면 또 들을 거면서, 그 양반 참 앙탈은....


대안 교과서가 나오면 달려가서 구입해 볼 생각이에요. 


안치환의 "노스텔지어" 음반을 구입할 때는 저 스스로 양은냄비 같았어요. 헤드폰 끼고 혼자 방안에 앉아

뭐 이리 시시해? 하면서도 혼자 막 비장해지곤 했죠. 그러다 금방 식어 버렸지만. 딱히 눈 앞에 이렇다 할 부조리도 없었고.

이제 막 끓어 오르는 건 없는데(피곤해요. 지쳐) 그대신 좀 끈질겨진 것 같기도 하네요.

나이 먹고 그런 것 하나는 좋네. 만만디...







+ 이번 게시물은 진자 역대급 바낭 아닙니까? 





    • 그래도 미리 질 거라고 낙담하고 싶진 않아요.
    • 그 나름대로 선택받은 인생이라는


      80년대의 대학생들이


      그 혜택을 포기하고 위험을 무릎쓰고 돌을 던졌었기에


      그나마 대통령직선제 같은 


      당시에는 불가능처럼 보였던


      작은 민주화나마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나왔죠.




      현실을 한탄만 하고 부정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싸워서 저항하는 것이


      그나마 더 짓밟히지 않고


      하나라도 내 것을 되찾고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숙명여대생들 두 명이 연행되었다는군요.


      지금도 싸우고 있는 젊은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글쓰신 심정은 이해가 충분히 갑니다만요...

      • 동감입니다. 선거에서 지더라도 다음에 뭔가 남길 수 있는 그런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지금도 그런 일을 해내고 있군요.
      • 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자유는 앞서간 누군가의 희생 덕분입니다. 그래서 다시 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침 밥상에서 밥맛이 뚝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싸워야죠.

        그리고 병아리 눈물만큼이라도 나아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짜증과 희망을 반복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을 거에요.


        그래도 2008년에 님을 위한 침묵를 부르면서 어처구니가 가출했던 느낌은... ㅠ.ㅠ 저만 느끼는게 아닌구요
    • 이글스의 <The Sad Cafe>도 있지요. 그런데 이 노래 중간에 나오는 


      we thought we could change this world with words like "love" and "freedom" we were part of the lonely crowd inside the sad cafe 


      같은 가사를 보면 뭔가 쓸쓸해지기도 합니다. 어쩐지 히피 문화에 대한 회고담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우리 식으로 말하면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후일담 같은 거랄까요.




      • ㅜㅠ 




        ... I know that you got your reasons


        these things that are pleasing you


        can hurt you somehow...




        댓글 읽는 순간 헉! 했어요. 갈빗대 아래를 들킨 기분이에요. 

    •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내 능력은 딱 한사람만 감당할 수 밖에 없구나 그리고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구나 싶더군요.


      그렇지만 온 힘을 다해 키운 그 아이가, 다들 나처럼 '내 능력은 이것뿐이다' 하고 내버려둔 체계 내에서 망가질 것을 생각하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네요.


      남들처럼 홍정욱을 찍고 실낱같은 기대로 희망에 차서 살아갈지, 노회찬을 찍고 노회찬이 삽질하고 무력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노회찬 혼자로는 분명 한계가 있으니까요) 우울해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홍정욱이 돈 부스러기를 가져다 줄 수도 있고, 노회찬이 이루어가는 깨알같은 정의를 보면서 희망에 차서 하루를 시작할 수도 있겠죠.


      어떤 선택이든 존중합니다. 그들의 선택은 이유가 있으니까요.



      • 온 힘을 다해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불쑥 불쑥 "네가 하는 말도 네 나름대로 일리는 있겠지, 그렇지만 내가 맞아." 라고 말 하고 싶어져서 깜짝깜짝 놀라요. 마흔이 되고, 예순이 되며 지금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겠죠. 분명히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그런데 딱 두 가지는 정말로 겁이 나요. 제 생각이 정의라고 단정하게 되는 것과, 아이가(꼭 아이가 아니더라도 젊은 세대가) 저와 말을 섞는 자체를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  

    • 예전에 어디서 조사를 했는데 학력수준이 낮고 경제수준(?)이 낮을 수록 여당 지지율이 높아지는 걸 통계로 볼 수 있었습니다


      어제 인천시는 저소득층의 의료보험비 지원을 전면 삭감했습니다.


      자신의 피와살을 떼어내어서라도 빨갱이에게 정권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그 분들의 신념에 경의를 표합니다



    • 세시봉 세대... 허 지랄도 가지가지.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어딘가에 나보다 더 외롭고 힘든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가 덜 힘들고 외로운 건 아니지만...




      새벽 세시에 응급실에 갔다 병실에서 바깥을 보면서 아 정말 힘들고 외롭다 싶은 생각이 많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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