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관계의 결말
시작은 막장드라마의 끄트머리였어요. 우리는 새로 뽑은 차를 느린 속도로 몰며 거리를 보고 있었죠. 배우 박원숙씨가 나타나기 전까지는요. 드라마 <백년의 유산>덕분에 박원숙씨는 막장드라마 악역으로 제 머릿속에 박혔나봐요. 그녀는 우리의 적이었어요. 저는 드라마에서 흔히 볼수있는 사각관계 구도에서 메인여주인공이었는데 박원숙씨는 악역인 서브여주인공의 어머니였거든요. 그녀는 우리의 사이드미러를 부순 전적이 있었어요. 우리중 한명이 부숴진 사이드미러를 증거로 갖고있다가 박원숙씨한테 들이대며 말했어요. "어이, 고소해버린다. 고소해버려?! 여기 증거물이 있다구." 박원숙씨는 애타는 얼굴로 안돼 안돼 하며 그것을 뺏으려 들었어요. 뒷좌석에 앉아있던 저는 그녀가 뺏기 전에 사이드미러를 숨겨버렸어요.
...그래서 흔히 볼수있는 러브스토리의 사각관계가 어떻게 여기까지 진행되었냐면 제가 주인공이고 남주인공은 현빈이었어요. 현빈은 제가 별로 선호하지 않는 남자연예인인데 음 이렇게 꿈에 나오다니... 이미지가 적절한 캐스팅이라고 생각했나 보죠, 그리고 서브여주인공이 신세경 느낌 나는 무명의 여자연예인이고, 서브남주인공이 악역전담인 이태성씨로 나왔어요. 저는 이태성씨를 꽤 좋아해요.
현빈은 귀족집안의 아들이에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예정이 되어있었고 현빈도 똑똑하고 착한 청년이라서 주변에 소문이 좋게 났죠.
그리고 저는 현빈의 약혼녀였고,
신세경은 현빈의 저택에서 고용한 하녀인데, 네 하녀, 전도연이 나오는 <하녀>에서처럼 현대배경인데 집이 서양식 저택이라서 그 분위기에 맞게 메이드복을 입고 일한다는 설정이요,
흔한 스토리로 제가 유학을 간다 뭐다 해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신세경이 현빈을 유혹하려고 하고 현빈은 안넘어가다가,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려요.
그리고는 신세경이 하는 말대로 자신이 신세경의 연인이라고 믿죠.
저는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분노로 펄펄 뛰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현빈에게 진실을 알려주려고 방방곡곡 뛰어다니죠.
한편 이태성은 저를 좋아하게 되서 저를 탐내고 신세경과 함께 작당해서 이태성은 저를 여친으로 삼고 신세경은 현빈과 계속 함께하는 걸로 스토리를 진행하려고 하죠.
저는 그와중에 신세경의 약점을 캐게 되고 그 약점을 현빈에게 말할거야! 라고 신세경에게 협박을 해서 신세경이 물러가요.
이태성도 기억을 되찾은 현빈에 의해 쫓겨나게 되요.
여기까지가 메인스토리인데 그 결말이 어떻게 되었냐면요.
이태성은 우리에게 쫓겨나서 아무데서도 취직할 자리가 없는거에요.
왜냐면 우리는 재벌이었으니까요.
재벌의 힘을 이용해서 이태성을 아무데서도 취직못하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불쌍한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경영하고 있는 영세한 동네피자집에 그를 직원으로 취직시켜주었어요.
주방직원 겸 배달직원 겸 해서요.
우리는 그와 함께 일했어요.
하지만 그가 아직도 저를 좋아하는지 불안했기 때문에 종종 노이로제가 걸려서 이태성에게 다그치듯 물어봤어요.
"너 아직도 나 좋아하니? 안 좋아하는 거 맞지?! 확실하지?!"
이태성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아니에요. 안 좋아한다니까요..." 하고 힘없이 대답했어요.
그런데 그 표정이 좋아하는데 안좋아한다고 숨기는 것처럼 보여서 걱정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어요. 그러면 안되지만.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꿈에서의 저는 못됐다고도 할수있죠. 악역이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을 짝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고 다시 병주고 약주듯 자신의 기업체에 취직시킨 다음 감시하면서 너 나 좋아하냐고 캐묻는 상황이라니.
아무튼, 그래서 이태성이 불쌍해졌어요. 우리가 이태성을 학대하고 있는 것 같은 거에요.
그래서 일을 그만두게 하기로 했어요. 일하는 건 힘드니까요. 그 사실을 우리중 한사람에게 말하니 "안돼! 그 사람은 우리의 전력이라구! 피자를 만들 사람이 그밖에 없다는걸 모르는거야?!" 같은 핀잔을 들었지만 우기고 우겨서 그를 그만두게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는 퇴직금을 주기위해서, 선심쓰듯이 말이죠, 우리중 대부분은 악덕업주처럼 퇴직금을 주는 것에 반대했지만, 저는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 4천만원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 옥신각신했어요. 쟤 퇴직금 줘야한다고. 퇴직금이 웬말이냐고.
그래서 이태성의 피자만들기 실력을 확인해보고 경우에 따라 퇴직금을 플러스마이너스 해주기로 했어요.
우리의 피자집은, 보통 피자라지 2판 가격이면 저희는 라지보다 더 커다란 사이즈의 피자... 그러니까 파파존스의 패밀리피자처럼 커다란 사이즈의 피자를 두개 주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었죠.
아무튼 열심히 피자를 만들고 있는 그의 작업을 중지시킨 후 피자박스에 담긴 갓나온 피자들을 둘러봤어요. 대부분 피자가 찢어져있었고 엉망진창이었어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칭찬했어요. 피자를 어쩜 이렇게 잘만들었냐고... 아마 퇴직금 4천만원을 주고 싶어서 제가 꿈에서 억지로 스토리를 진행시킨 것 같아요.
오늘의 이야기는 제가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라는,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스토리였는데, 이태성이 매우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