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 사직 어린이 도서관

1. 오래간만에 로알드 달의 책을 들춰보게 되었습니다.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는 첫 장부터 로알드 달답게 냉혹합니다. 


제임스는 네 살이 될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제임스의 엄마 아빠가 런던에 갔다가 성난 코뿔소에게 먹히고 말았죠. 그렇지만 이 부모님들의 인생은 제임스에 비하면 별로 나쁜 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임스의 인생은 앞으로 꼬이는 것만 남았지만 제임스의 부모님은 순식간에 죽었으니까요. (첫장의 요약. 문장 그대로의 번역은 아닙니다)


어렸을 때는 왜 로알드 달을 보면서 잔인하다 생각을 전혀 못했을까요? 초등학생이던 저는 그냥 이제부터 제임스의 모험이 시작되나보다 했지, 부모 없는 아이의 슬픈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찰리의 초콜렛 공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초콜렛 공장의 규모와 부유함을 음미하느라, 찰리네 가정의 가난함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죠. 이제는 부모가 되니, 고아가 된 제임스나 가난한 찰리의 아픔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로알드 달을 달리 읽게 됩니다. 


2. 제가 처음 로알드 달의 책을 읽게 된 것은 서울시립 어린이 도서관 (사직도서관)에서였습니다. 저의 부모님 세대는 '분노의 포도'와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고 이해했을 지언정, 로알드 달과 같은 해외 어린이 도서에는 정통하지 못하셨죠. 부모님들 주머니로는 도저히 자식들의 책읽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구요. 그러나 제 어머니가 사직도서관을 알려주셨고, 제가 국민학교 삼학년 무렵부터 저는 사직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오학년 때에는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버스를 타고 사직도서관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사직도서관에 가까이 왔다는 신호는 사직터널이었죠.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나의 도서관이 나온다, 라고 생각하며 버스 안에서 긴장을 놓지 않았죠. 그때는 핸드폰도 없던 시대였는데, 어째서 그렇게 다닐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호호 아줌마" "말괄량이 삐삐"가 만화영화/티비 드라마가 아니라 원작이 있다는 걸 알았고, 정말이지 세상이 넓다는 것을 어린 머리로 배웠습니다. 사직도서관에는 쥐포 파는 곳이 있었고, 동상이 있었고, 또 비둘기가 많았죠. 쥐포는 (제 기억이 옳다면) 오십원이었습니다. 책을 여러권 빌려가지고 돌아오는 길, 쥐포를 입안에서 불려가며 조금씩 갉아먹는 그 순간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사직도서관 화단에는 매년 사루비아 꽃이 빨갛게 피었는데, 긴 꽃 끝에 조금 꿀이 들어 있어서 뽑아먹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3. 해외에 나와서 여러 나라 사람들과 담소를 나눌 때에도, 로알드 달이나 줄리 앤드류스, 아이작 아시모프 이야기를 하면 친구가 되기도 쉽고 대화나누기도 수월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도서관은 1979년에 지어진 도서관입니다. 30여년 전에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지만, 사직도서관은 저보다 부유한 나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해외의 제 또래들과 국적과 출신계급을 초월해서 공감을 나눌 수 있게 도와주었죠. 사직도서관은 숨가쁜 80년대, 90년대를 통과하면서 지친 어린이들을 위로해주고 교육시켜준 것입니다. 현재도 연간 이용자가 백만명이 넘는다고 하네요.


4. 2027년 이후 사직도서관을 없애고 사직단을 만든다는 소리가 있었다고 하네요. 


2015년 1월 27일 문화재청이 발표한 "사직단 복원 정비계획"에 의하면 2027년 이후에는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과 서울시립종로도서관은 이곳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춥니다. 문화재청은 두 도서관을 사직단의 후원으로 조성해 산책로로 개방한다고 합니다. 바로 뒤에 인왕산 자락길과 수성계곡이 있는데, 한 해 각각 100만 명 이상이 이용하는 두 도서관을 헌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서울에는 두 도서관을 옮길 만한 대체부지도 없습니다!

사직단을 보존하기 위해 어린이도서관을 헌다고 합니다. 서울의 중심가에는 어린이도서관을 지을 만한 대체부지가 없으며 새로 짓는다 해도 그 역사적 의미는 퇴색되고 말 것입니다. '사직단이냐, 어린이도서관이냐’를 놓고 결코 양자택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직단도 어린이도서관과 종로도서관도 함께 보존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와 관련한 박정현 건축 평론가의 기고입니다.


최근 문화재청이 사직단을 복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종로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을 철거하기로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지역 시민들의 문화공간이자 동시에 서울의 가까운 과거를 증언하는 두 도서관을 대안 없이 철거하면서까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을 되살리려 한다. 이번에도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 정기를 복원한다는 논리가 모든 논의를 원천봉쇄했다. 복원과 철거 어디든 동원되는 전가의 보도다. 사직단 복원은 우스꽝스런 또 하나의 한양 테마파크일 뿐이다. 멀쩡히 남아 있었다 한들, 현재적 의미가 전무한 사직단은 시민에 의해 전유되어 마땅한 유적이다. 공원으로 사용되는 지금의 기능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주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와 관련한 조진서씨의 포스팅입니다.


2015년 6월 5일, 문화재청은 사직도서관을 철거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정말 기쁜 소식이네요. 


https://www.facebook.com/kplibrary

https://twitter.com/keep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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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지군요. 언제나와 같은 배드 엔딩일꺼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입니다.

    • 와, 반가운 소식이네요!


      사직도서관 + 어린이 도서관 철거한다는 얘기 들었을 때, 왜 이 나라는 부수지 못해 안달일까 화가 났었는데 이렇게 남겨줘서 감사해요!!


      겨자님과 마찬가지로, 저도 사직도서관의 추억이 많습니다. 도서관 앞에서 라면먹다가 비둘기가 라면에 달려들어서 그 이후로는 비둘기 공포증도 생겼고 ㅎㅎ


      초딩때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다른 세계로 날 인도할것 같은 사직터널을 지나 어린이 도서관에서 놀았고, 그 옆의 중고등학교를 나와, 시험기간엔 늘 시작도서관에서 시험 공부를 했죠.


      겨자님의 글 덕분에 유년시절, 청소년 시절을 회상할 수 있어 행복했고, 도서관이 철거되지 않는 다는 기쁜소식까지 너무 감사합니다!

      • 사실 저는 사직도서관 지키기 운동에 참가하지도 못했는데, 다른 분들이 고생하셔서 도서관이 온전하게 되니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 아이들 보는 책에서 부모를 시크하게 날려버리는 경우는 흔한 것 같아요. 어른과 아이들 세상 보는 눈이 달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얼마 전에 조카한테 엄지 공주 읽어주다가 진심으로 어머 이걸 어떡해 하는 감정이 되더군요. 그 조그만 게 보호자도 없이...


      안전 문제로 건물 철거, 도시 계획으로 동네 전체가 철거, 낡아서 개축....기타 등등으로 오래된 건물이 사라지면 추억도 같이 사라지는 기분이에요. 하지만 주로 이용하는 세대들에게 그들에게 맞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안전 문제야 어쩔 수 없으니 논외로 하고, 사직단 때문에 철거라니 사직 도서관도 좀 다른 문젠 안것 같고요.

      본가 있던 동네가 뉴타운으로 완전히 뒤엎어진 입장이라, 옛것이 사라지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감정적인 부담이지만요.


      근데 코뿔소가 왠지 초식동물 같아서 검색해 보니까 진짜 초식동물이네요.
      • 분명 책에 다 나온 내용인데도 어려서는 전혀 눈에 안들어왔다는 게 신기하지요. 찰리네에는 침대에만 누워있는 조부모가 넷이나 된다, 이 부분을 읽고도 나도 언젠가 저렇게 일 안하고 침대에 누워서만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으니 말이예요. 




        저는 요즘 "헝거게임"도 편하게 볼 수가 없어요. 

    • 박정현 평론가의 글이 내 생각입니다. 이씨 조선을 다시 개창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들 집터를 왜 자꾸 국민세금으로 복구하려고 하죠. 

      • 정말 공감했었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 1번 ....찰리와 초콜릿공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그거였어요. 한 침대에 부모님의 부모님 네 분이 누워있다는 대목에서 찡...외국에서 침대는 정말 중요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 침대에 두명도 아니고 네명이라니. 찰리네의 가난이 상상도 안 갈 지경이었어요. 그 가난 속에 사는 분들이 찰리에게 초콜릿 사라고 아껴둔 용돈을 ㅜㅜ 전 그 뒤의 모험담은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어요. 앞부분의 가족들 이야기에 비하면요. 

      • 가만, 그 돈은 네 명이 각출한 게 아니고, 조부모 중에서 한 명에게서 나온 것 아니던가요? 저도 확신이 안 서는데 찾아봐야겠네요.
        • 아니, 기억하시는게 맞아요. 각출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전 한사람만의 돈이란 생각이 안 들었어요.

          • 그 왜 그렇게 귀중한 돈으로 어렵게 산 초콜렛에서도 당첨권이 안나오지 않던가요? ㅜ_ㅜ 저는 그 부분에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만만한 책이 아니란 생각을 했었죠. 

    • 제목 보자마자 아 거기 이제 없어지지 않나 이런 생각으로 클릭했는데 좋은 소식이 들어 있어서 좋은 글과 함께 더욱 기쁘네요. 

    • 저도 기쁩니다. 그만 짓고 그만 허물고 있는 것 활용할 궁리 좀 했으면 좋겠어요.

    • 듀게에 관련한 글이 지난해던가 올라온 기억이 납니다.


      보존해야할 가치가 있는 건축물은 아니지만 사직단을 복원하기 위해 철거한다는건 어이가 없었어요.


      건축물 자체의 가치만 보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시간과 삶의 흔적들을 너무 가볍게 여긴게 아닌가 싶었구요.


      철거방침이 철회되었다니 참 다행입니다. 새로 짓더라도 기존의 콘텍스트를 살리고 연속성을 갖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울시 총괄건축사가 승효상씨인데...서울시 관할 프로젝트로 추진된다면 딱 좋을텐데....

    • 헉, 저랑 완전 같은 추억을 갖고 계시네요^^


      저도 어릴때 사직어린이도서관 참 자주 갔었고 로알드 달도 그곳에서 제일 처음 접했구요ㅎㅎ


      사직도서관에서 먹었던 도시락 라면 정말 맛있었어요ㅋ (왜 요즘은 국내에서 보기가 힘든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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