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인의 믿음에 대해서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개신교인의 믿음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개신교도 종파가 여럿이고
믿음의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 건,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끼리의 암묵적인 합의일 뿐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믿음이란 어딘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 의심을 갖고 바라봐야 할 것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하는 이야기는 그저 개인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맞다고 주장할 생각도 없고, 어차피 이런 건 그런 이야기겠죠.
사도 바울의 세계관은 신이 있고, 그 아래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겁니다.
신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친구가 자신을 사랑하고 목숨까지 바친다면 미안하고 고맙겠죠.
그 사건을 믿고, 납득하는 게 개신교인의 믿음일 겁니다.
하지만 이걸 믿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말로는 얼마든지 믿는다고 할 수 있지만 정말 믿어지는 건 다른 문제거든요.
고린도전서 1장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게 정말 믿어진다고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이거든요.
온갓 나쁜 짓을 저질러도 죽기 전에 믿으면 그만이라는 말도 있지만, 죽음의 시각을 정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라는 게 언제 올지 언제 사라질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믿음이라는 게 생기더라도 그게 착각이나 오해 같은 거라고 여겨질수도 있거든요.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는데, 행동이 없다면 믿음은 죽게 되어있습니다.
지속적인 행동이 없다면 누가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는 게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상태가 되기 쉽습니다.
그저 껍데기인 믿음이 있고, 실제로는 작은 호롱불이라도 타고 있는 건 없을수도 있죠.
마태복음 25장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대충 이런 게 바울의 세계관인것 같습니다.
바울을 어느 정도 빼고 보더라도, 예수에겐 배울 점이 있죠.
악에 악으로 저항하지 않고 다 받아낸 면이요.
서폿이 미니언 하나 먹었다고 싸움이 나는 세상에서 희귀한 거겠지만요.
개신교에 국한시키지 않아도, 사람에겐 각자의 세계관과 도덕적인 기준이 있고
그것에 맞춰가려고 애써보지만 아마 대부분은 실패할겁니다. 누군가의 희생 같은 것도 대체로 잊어버리게 되겠죠.
어떻게 맺어야할지 모르겠으니 노래나...
읽고 보니 딱히 ‘개신교인의 믿음’이라는 제목을 달을 필요는 없는 내용같군요.
기독교…… 아니 어느 종교에 대하여도 믿음은 고민해볼 만한 문제니까요.
우리에겐 과학이 있고, 논리가 있고, 합리적 추론(과 합리적 의심)이 있습니다. 어떤 주의/주장/이론이 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증거, 근거가 확실하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근거가 불확실하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한, 근거와 논리가 충분하지 않은 데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를 비합리적, 비과학적 태도로 간주합니다.
예를 들어 ‘신의 존재’가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증명되지 않은 주장이므로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그런데… 신의 존재에 대한 근거가 확실하다면 무신론자도 자신의 기존 인식을 접고 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겁니다. 그게 과학적, 합리적 태도니까요.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이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인정’임에도)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그 시점에서 과학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을 받아들인(승인)한 것이지 믿음은 아니지요.
종교 얘기는 너무 거창하군요. 사람과 사람 간의 믿음은 어떨까요?
A가 나에게 천만 원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내가 판단할 때 A는 충분히 빚을 갚을 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사회적 위치도 신뢰할만하고, 가진 재산도 있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겼을 때 사후에 내가 A 에게 취할만한 조치들도 있습니다. 그런 합리적 판단의 결과로서 A에게 천만 원을 빌려주기로 했습니다.
자 이것은 내가 A를 믿고서 빌려준 것일까요?
나는 A를 믿은 것일까요?
제가 그 종교에 속해 있었으니 말하기 쉽게 제목을 달았네요. 그 기반으로 말하는게 편하거든요.
저도 종교적 믿음은 과학적인 증명으로 얻거나 폐기할 수 없는 까다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감정적인 기반이 더 크거든요.
파스칼이 팡세에서 그랬던것 같은데, 신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거리가 멀다는 식의 얘기를 했었죠.
간단하게 생각했지만 믿음이란 건 까다롭네요.
저는 기독교인인데도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에 실린 박성환님의 '관광지에서'는 감동하며 읽었습니다. 불교의 신앙이 어떤지는 전혀 모르고 교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종교에 상관없이 경건한 신앙인의 모습은 좋아 보이더군요.
검색해보니 소설이네요. 이런 한국 SF 모음집은 도서관에서 눈에 띄면 읽어보곤 하는데 처음봅니다. 저도 이상한 종교가 아니라면 나름대로 다들 좋아보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