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흡연


담배를 핀 지 9년이에요. 담배값이 올랐죠. 미리 사둔 담배가 있어 지금은 실감이 안 나지만 언젠가 감당해야 하는 가격이 될지도 모릅니다.

한참 여행을 다닐 때 만원에 가까운 담배 가격을 지불하던 날들이 있었어요. 그 가격 때문인지 유난히 말아피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혓바닥으로 종이를 핥으며 담배 한 개피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 저만 보면 가까이 다가와 하나만 달라고 요구하던 행인들도 많았죠. 

언젠가는 담배 한개피를 돌려피면서 농담을 나누던 추운 겨울날의 새벽도 생각이 납니다. 


그게 다 담배가 너무 비싸서 그랬죠.


사실 계속 담배를 피는 이유라던가, 금연이 힘든 사정 과 같은 진부한 얘기를 하려고 이 말을 꺼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든 9년 동안 같은 행동을 하다보니, 그것에 묶인 기억이 제법 있더군요. 


여행 얘기가 우연히 나오니 떠오르네요. 사실 여행자가 우연히 만나면 항상 이야기 꽃이 피기 마련이지만,  함께 담배를 필 때면 

이야기는 더 기묘한 분위기로 흘러갔어요. 함께 맥주 한잔을 마시는 것보다는 가볍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상태로 대화하는 것보다는 무거운 대화.

보통은 술집이나 숙소에서 만났어도 담배를 필 때면 밖으로  나와야했고, 텅 빈 야밤의 풍경을 바라보며 함께 나누는 대화가 이어졌죠. 

그래서 담배를 나누던 사람들은 더 분명히 기억이 나요. 그들과 함께 보았던, 흰 연기 섞인 풍경. 우리를 비추던 가로등 불빛,  

연기 사이로 희미하게 비추던 그 사람의 얼굴, 담배 불빛이 커질 때마다 환하게 드러나던 표정까지.  


한번은 14시간 동안 기차를 탄 적이 있어요. 흡연자에게 14시간 동안의 금연은 숨을 참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이기에, 

기차가 멈춰설 때마다 흡연자들은 모두 나와 함께 담배를 피었죠. 처음 정차했을 때는 서로 무심하게 피웠지만 

기차가 간이역에 멈출 때마다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어요. 통성명을 하고 행선지를 묻고 나중에 가서는 가족 얘기까지 나왔죠.


그 기차를 내리고 난 뒤에는 아무도 서로를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담배가 줄어들 때마다 점점 가까워지던 변화는 제법 오래 마음에 남았어요.

술자리 만큼, 담배를 함께 나눌 때만 가능한 대화들이 있어요. 술자리의 대화가 본론이라면, 흡연석의 대화는 후일담 같아요.

그리고 또 언젠가 제가 좋아하던 사람이 '담배 냄새 나는 입에 키스하는 것'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네요. 그 말을 듣고 우타다 히카루의 노래가사를 떠올렸어요.

정현종의 시 도 생각이 나네요. 젯더리에 가득 쌓인 담배를 보며 그리스 신전의 기둥을 떠올리는...? 


혹시 일본 영화 <우울한 청춘>을 기억하시는 분 있나요? 허세돋게 제가 담배를 피게 된 계기는 이 영화 때문이에요. 

고등학생 주인공이 매일 학교 옥상에서 담배를 피는데  왠지 그 당시에 제가 처했던 암울한 정서 때문인지 몰라도 

아 저런 기분으로 담배를 피는거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 같아요.(지금 생각하면 참 허세스럽죠.) 


아주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어른들의 감정과 행동의 이유를 영화에서 배웠던 것 같기는 한데, 

나이가 들고 나서 담배를 피게 된 계기가 저보다 어린 고등학생의 허세섞인 우울감을 따라한 게 되어버렸죠. 

9년 동안 건강을 해친 이유가 영화 한편 때문이라니. 참.... (중2병때문이겠지.) 

생각해보면 저의 친 형도 15년 넘게 말보로 레드를 피는데, 그 이유는 다들 아시겠죠. ㅎ



1월 중순에 긴 여행을 다녀오면 담배를 끊어볼 생각이에요.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이 정부는 흡연욕구는 매일 자극하는데, 담배값을 올린다. 정말 고단수의 세금 정책이다."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래요.

답답하고 갑갑하고 짜증나고 화가 나는 뉴스로 가득한 시절에 담배를 끊는 다는 건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다가 그렇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나 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사실 그냥 중독, 습관으로 9년을 입에 문 것인데 , 거기에 대단한 이유나 담배의 추억 때문에 피고 있을리는 없어요. 

뭔가 의식의 흐름처럼 적다보니 별별 이야기가 다 나왔네요. 그냥 이제는 우울해서 피는 것이 아니라, 흡연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딱 이정도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데 .


하지만 지난 9년 동안 홀로 힘에 겨울 때마다 하던 행동이 곧 입에 담배를 무는 일이었고 아마도 그것이 유일한 저의 대처방식 이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런 경험과 기억들이 함께 담배에 뭉친 탓이겠죠. 혼자 담배를 피던 시간은 조금은 슬프고 답답하고 화가 날 때가 많았어요.

아무리 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레오스 카락스 영화 ( 혹은 그에 관한 다큐?) 의 한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한 남자가 컴퓨터에 "나는 오늘부터 담배를 끊는다"라고 타이핑 하고 난 뒤

서랍 속에 총을 꺼내서 머리를 쏘던 장면. 


아 정말 담배에 관한 이야기는 왜 모두 허세스럽게 느껴지는 걸까요.  담배 한 대 피고 생각해볼게요.




 






 









    • 우스개 소리로 '혈연, 지연, 학연, 그리고 흡연' 이란 말도 있지요. 담배는 분명 건강에는 백해무익하지만 이 녀석이 없었더라면 그리 깊어지지 못했을 인연, 오가지 못했을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오르기도 해요. 그럴때마다 기분이 참 묘해집니다. 뭐 사실 술도 마찬가지긴한데(...)

      • 뭔가 술자리는 준비된 자리 같은데 흡연자리(?)는 우연 같은 느낌이라...더 기억에 남는 건지도.

    • 9년이면 끊을 수 있으실 거예요 우선 아침에 일어나서 한 시간 참기 잠들기 전 담배 참기부터 시작해서 줄여 나아가시길 여행길에서 아득한 풍경을 바라보며 담배 물면 참 멋지지만 현실은 냉혹하죠 닭장 같은 흡연실에 뻐금거리는 연기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흡연자들도 없을 테니..
    • 하긴 예전 회사에서도 중요한 많은 일들이 흡연하는 와중에 교환되고 조정되곤 했죠. 그래서 비 흡연자들에게는 불만이었다는..



    • 벌써 4년도 넘었네요, 제가 듀게에 이런 글을 쓴 지(수줍;;;) http://www.djuna.kr/xe/index.php?mid=board&document_srl=912470


      철저히 제 주관적인 견해로는... 뭐든 안 그렇겠는가만, 정말 금연을 하고 싶다면 많은 여지를 주면 안 돼요. 그냥 무념무상으로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딱. 그렇지 않으면 저는 그 숱한 미련이, 담배에 걸맞는 공기가 사라지기란 차라리 제가 죽는 게 빠를 거라


      여겼는 걸요. 물론 이것은 제 성정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독하고 모진 면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저는 담배가


      그렇게 좋다면 굳이 금연을 할 필요가 있나 싶어요(좀 위험한 발언인가요?). 흡연을 하기까지의 그 귀찮음과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


      주위의 눈총, 생명이 위독할 만큼 나빠진 건강, 살인적인 담뱃값이 걸려 도무지 끊지 않을 수 없다는 동기부여가 아니라면...


      제 (비싼)돈 주고 피우겠다는 애연가들에게도 담배를 즐길 수 있는 권리는 담보를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담배를 피워야 할 것


      같은 일은 점차 더 늘어만 가는데도 왜 갈수록 흡연자들에게만 야박한 세상이 되어가는지 조금은 안쓰러워서요.


      이건 제가 두 세계를 다 경험해 봤기 때문에나 가능한 소릴까요만...

    • 헛 저 우울한 청춘 기억해요! 10년 전쯤 마츠다 류헤이에 푹 빠져 있었죠 그 허세돋던 고등학생도 지금은 애아빠ㅋㅋ


      금연 꼭 성공하세요~
      • 행복하다면 손뼉을 쳐보자...! 였던가요 젊은 배우들 구경하는 게 참 흐뭇했는데 말이죠
    • 당연한 얘기지만, 담배를 안 가지고 있으면 끊어집니다.

    • 건강에 문제가 생겨 끊을 수밖에는 없을 것 같아(...) 담배 끊은 지 몇 달 됐습니다만, 담배만한 친구가 없는 것도 사실이라고 전 자주 생각합니다. 왜 담배가 주는 위안은 담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딜레마죠. 앞으로는 그냥 가끔 담배 피우던 걸 추억; 할 수밖에 없지만 아쉬움도 여전합니다. 전 헤비 스모커도 아니고 한 달에 몇 번만 가끔 피우는 수준이었는데 말이죠. 저도 담배가 제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뼛속까지 자각한 다음에야 담배를 끊어야겠군 싶었는데 이런 큰 계기가 있으면 단박에 끊게 되기도 합니다. 금연의 동기부여란 아주 중요하죠. 성공하시길 빕니다. 


      리플 달고 보니 저에겐 흡연권장영화로서 '스모크'가 생각나는군요.



    • 저는 20년 넘게 피던 담배를 작년에 끊었는데요, 흡연의 즐거움도 함께 날아갔어요. 건강에는 분명 좋지 않았겠지만 그 쾌감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사라져버린 게 지금은 좀 허전하고 섭섭합니다.

    • 애절하네요 죽는다는 마지막 타이핑.


      금연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의 전환점이 있어서 가능한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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