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시 당선작
선수가 선수를 알아봅니다.
▲ 선수들
전성기를 지난 저녁이 엘피판처럼 튄다
도착해보면 인저리타임
목공소를 지나 동사무소, 골목은 늘 복사된다
어둑해지는 판화 속에서 옆집이라는 이름을 골라낸다
옆집하고 발음하면 창문을 연기하는 배우 같다
보험하는 옛애인이 전화한 날의 저녁은
폭설과 허공 사이에서 방황하고
과외하는 친구의 문자를 받은 날 아침은
접시 위의 두부처럼 무심해진다
만약이라는 말에 집중한다
만약은 수비수 두세 명은 쉽게 제쳤으며
늘 성적증명서보다 힘이 셌다
얇은 사전을 골라 가장 극적인 단어를 찾는다
아름다운 지진이란
지구의 맨 끝으로 달려가 구두를 잃어버리는 것
멀리 있는 산이 침을 삼킨다
하늘에선 땅을 잃은 문장들이 장작 대신 타고
원을 그리며 날던 새들의 깃털이 영하로 떨어진다
원점은 어딘가 빙점과 닮았다
양철 테두리를 한 깡통처럼
전력을 다해 서 있는 트랙처럼
잠시라도 폼을 잃어선 안 된다
전광판이 꺼지더라도
경기가 끝나면 유니폼을 바꿔 입어야 한다
응모작들 중 가장 두드러진 작품은 ‘선수들’이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그러했지만,
이 시인은 무슨 제재를 다루든지 일거에 대상을 장악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과 리듬으로 시를 운산(運算)하는 범상치 않은 솜씨를 보여주었다.
특히 표제작인 ‘선수들’은 언어와 언어가 충돌하며 파열하는 섬광 같은 것을 뿜어내면서
자기 시를 “전력을 다해 서 있는” 삶의 트랙으로 밀어붙인다.
그리하여 이 시는 시적인 것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해 ‘다른 시’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한치의 오차도 허락지 않는 이 주밀한 자본의 세계에서 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균열과 의외성이다.
트랙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결말을 짐작할 수 없는 것으로의 이 과감한 투신의 성과를 당선작으로 미는 데 우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역시 시는 어려워
영시 번역 해 놓은 듯 하군요.
즐겁게 잘 보았어요.
과외하는 친구나, 보험하는 옛애인 이야기를 봐선 중년의 화자같은데
말하는 방식이나 시어들은
인터넷 세대의 감성이 보이네요.
"두부처럼 무심해진다"를 보고 갑자기 이 시가 떠올랐어요.
(재미있어서 웃으면서 봤던 시예요. ^^)
동사무소에 가자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
외로울 때는
동사무소에 가자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어제 죽은 사람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곳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전생이 궁금해지고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
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
짧은 질문을 던지지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는 그 질문이 없는 곳
그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에 가자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라든가
그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
자꾸 생각하게 될 때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거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을 때
왼발을 든 채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자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명료해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고
왼발을 들고
저도 underground님이 올려주신 시가 훨씬 더 와닿고 좋네요. 본문의 시는 왠지 좀 경직되어 있달까요...
새해 결심한 게 별로 없었는데 가끔영화님이 시를 가져오신 덕분에 올해는 시집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에 제가 가져온 시도 몇 년 전에 읽었던 것이고 요즘 시집은 쳐다보지도 않았네요. ^^)
시는 짧아서 [읽는 데 들이는 시간] 대 [얻을 수 있는 재밌는 표현]의 시간 대 성능비가 높은 것 같아요.
시의 내용도 이해되면 좋겠지만 ^^ 저는 그냥 재미있는 비유나 신신한 단어들의 조합을 찾아보는 재미로 읽거든요.
위의 경향신문 시도 다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양철 테두리를 한 깡통", "전력을 다해 서 있는 트랙" 부분이 재미있었어요.
원을 그리며 날던 새들의 깃털은 얼고, 둥근 테두리를 가진 깡통은 원점에 도착하면 뜯겨서 내용물이 먹히고, 선수들은 둥근 트랙을 빙글빙글 돌다가 원점으로 돌아오고, 여러가지 형태로 둥글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신선했어요.
(참치캔을 수백 번은 땄을 텐데 저는 깡통 윗면의 둥근 원들과 육상 트랙을 연결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 갑자기 참치캔 뚜껑의 원들이 참치의 삶을 기리기 위한 나이테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네요. ^^)
"두부처럼 무심해진다"도 제가 이장욱 시인의 시를 몰랐으면 더 신선하게 느꼈을 비유고요.
(두부는 썰 때 소리도 안 나고 힘도 안 들고 도마에서 튕겨나가거나 미끄러지려고도 하지 않고, 정말 조용하고 무심한 친구인 것 같아요. ^^)
2~3분 들여서 시를 읽고 재미있는 표현을 1~2개 얻을 수 있으면 그리 억울하지 않은 독서인 것 같아요.
(그래도 저도 이장욱 시인의 시가 더 와닿고 좋아요. ^^ 제가 옮겨온 시를 좋아해 주셔서 기쁘고요.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