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킨스 풍의 인터스텔라 감상문(스포)

백만년 만에 듀게에 뒷북 영화 감상문 하나 끄적여둔 거 올려 봅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네요.^^;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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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가 몰리는 것에는 일단 거리를 두었다가 찬찬히 살피는 버릇이 있어 인터스텔라도 최근에서야 봤다. 영상적으로 뛰어난 장면들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놀란의 전작들만큼 강한 인상을 받진 못했다.

감상글들을 보면 '잘은 모르겠지만 심오한 영화인 것 같다'는 반응들이 많던데 이름값이라는 권위에의 순종이 아닌지. 잘 모르겠으면 그냥 잘 모르는 거고, 각자 자기가 알겠는 범위 내에서 즐기면 그만.

나 역시 웜홀이고 화이트홀이고 5차원이고 이런 건 잘 모르니 그냥 일단 그렇다치고 보았다.

 

놀란의 전작들과 달리 의외로 단순한 스토리여서 오히려 놀란 면이 있다. 온갖 엄청난 과학 얘기를 하더니 사랑이 인류를 구원한다구? 그건 너무 흔하디 흔한 헐리웃 공식이잖니? ..라고 첨엔 생각했다.

그런데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 '사랑'도 과학의 시각에서 제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 머피에 대한 사랑으로 차원을 넘어 생존 정보를 전달한다. 딸은 죽음을 앞둔 주인공의 유전자를 전할 존재다. 주인공에게는 아들도 있지만(게다가 걔가 더 열심히 영상메시지를 우주로 보냈었다) 영화 내내 주인공은 딸만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와 더 유사한 특성을 가진, 다시 말해 동일한 유전자를 더 많이 물려받은 쪽에 본능적으로 집착하는 것 아닐까.

 

아들은 농부다. 현상유지에 집착하여 평생 살던 그 집을 떠나지 않으며 최후에 순응한다. 딸은 과학자요, 탐험가다. 학교에서부터 무력한 체제에 순응하지 않더니 자길 버렸다고 아빠에 대한 집착도 매몰차게 끊고 새로운 도전에 올인한다. 딸은 주인공과 더 닮았을 뿐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생존가능성이 더 높은 우성 인자이기까지 한 거다. 보면서 난 아들이 측은했다. 이 영화 어쩌면 스티븐 호킹보다 리처드 도킨스에 더 빚을 지고 있는 건 아닐까.

 

밋밋하게 흘러가던 영화 흐름에 반전을 준 건 맷 데이먼. 인류를 구할 리더격 과학자라더니 사이코패스로 돌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직설적으로 이런 얘기를 한다. 주인공을 낭떠러지로 몰아 넣고는 한다는 소리가 "자네가 죽음을 앞두면 뭘 보게 될 것 같은가? 바로 자식들의 얼굴이야.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더 악착같이 살려고 하겠지. 자식들을 위해서..." 알고보면 도킨스님의 관객을 위한 친절한 해설인지도.

 

맷 데이먼은 이때 비로소 폭로한다. 마이클 케인(할아버지 박사)이 얘기한 플랜A(모든 사람을 살리는 것)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고. 인류라는 종을 보존하기 위해 수정란을 이주시키는 플랜B가 진짜 목적이고 그 임무에 자원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플랜A를 이용한 것 뿐이라고.

 

이성을 신봉하는 과학자, 지식인들은 냉정하게 가능성을 분석한 후 인류라는 종족 유지 본능에 충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유감스럽게도 개미 종족과 달랐다. 종족 차원보다 개체 차원의 생존 본능, 유전자 보호 본능이 더 강했다. 이 계획을 세운 맷 데이먼 본인도 자기가 어떻게든 살기 위해 거짓 신호를 보내 플랜B 실행을 방해하고 말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블랙홀을 넘어 생존 정보를 보내 결과적으로 인류를 구원한 것 역시 딸이라는 자기 개체 유전자에 대한 '사랑'이었다.

 

감동을 떨어뜨리는 삭막한 얘기라구? 우리의 희생적인 행위 기저에 본능의 작동이 있다하여 그 가치가 훼손되는 건 아니다. 과학이 인간 행위의 100%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내부에도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블랙홀 내부 같은 공간이 있고, 거기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지 않을까. 

앤 해서웨이는 블랙홀을 지나 오롯이 혼자서 연인에게로 날아갔다.

    • 오 재밌게 읽었어요

    • 흠 저하고 파악하신 내용  (제 리뷰의 '스포일러 섹션' 에 실림) 이 똑같은데 우연의 일치겠죠?  ^ ^ 그런데 결론이 앤해서웨이가 이기는 쪽으로 끝났으니 이영화는 도킨스선생의 사상을 전도하는 작품이 전혀 아니고 반 (反)- 통속 사회/심리생물학적 적 사상에 기조를 둔 작품으로 봐야 할거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뭐 물론 (통속적인 이해를 넘어선 전문지식으로서의) 진화사회/심리학쪽에서도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  네 슈퍼맨이 바로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지구에서 만큼은요 오랜만에 오셨어요.

    • 재미있네요. 영화의 심하게 도킨스적인 세계관을 지적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의아했는데 잘 긁어주셨습니다.


      그런데 Q님께서 실은 이게 안티-도킨스라고 하시니 Q님 리뷰도 잘 읽어보겠습니다 ㅎㅎ

    • 오 Q님 리뷰 가서 읽어보고 왔는데 정말 재밌네요. 저랑 비슷한 발상이지만 훨씬 더 풍성하게 해석해 주셨네요. 저는 유전자 차원의 본능/그것만으로 설명안되는 자유의지의 영역으로 단순화시켜봤지요.



      하긴 도킨스적인 세계관에 그친다고 하면 좀 심심하죠. 놀란 감독, 다크 나이트 때에는 마이클 샌델, 인터스텔라에서는 도킨스를 가지고 노는 건지도.



      말씀하신대로 통속적인 이해를 넘어선 전문지식으로서의 진화사회/심리학에서는 앤 해서웨이의 선택 역시 설명할 논리가 있을 것 같지만, 굳이 알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도 드네요.



      '사랑'을 유물론인 진화론으로만 해석하려 하는 것은 한계가 처음부터 분명할 테니 말이죠. 현상학이 차라리 나을지도. 



       

    • 인터스텔라를 못 봐서 처음 여섯 줄만 읽고 그냥 댓글로 내려왔는데 


      다른 분들 댓글을 힐끔힐끔 보니 뭔가 재미있는 내용 같아서 궁금해요. ^^


      (크리스마스가 홈커밍 데이인가요? 오랫동안 뜸했던 듀게님들이 선물 싸들고 찾아오시는 것 같아요.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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