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할 때의 마음 가짐

살다보면 내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꼭 붙고 싶었던 시험, 찍었다가 고쳤는데 틀린 문제, 준준 결승에서 밀려난 대회, 가고 싶었던 1지망 대학, 다니고 싶었던 직장, 가지지 못한 마음, 놓쳐버린 사람, 중간에 끊긴 관계...


그럴 때마다 '여우와 신포도' 전략을 따랐습니다.

그거 붙어 봤자 뭐 한다고, 그 문제 풀었어도 어차피..., 대회 1등 해 봤자..., 그 대학 나왔다고 다 출세하나 옆 집 아무개는 거기 나와서 별 볼일 없이 살더라, 그 회사 연봉은 높지만 사람 잡는다고, 그 사람은 내 인연이 아니었어 외모만 근사했지 바람둥이일 걸 차라리 잘 된 거야.... 등등등.


그러면 당장은 속이 시원하긴 한데, 마음에 한 톨 찜찜함이 남았습니다.

잠 못 드는 밤 침대 위에서 뒤척일 때, 내가 놓친 것/사람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비슷한 조건에서 나와는 달리 원하는 걸 손에 얻은 지인을 보았을 때...

사실 그게 '신포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왈칵 왈칵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뭔가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금도 진행중이지만, 그 때 저는 누군가를 어렵게 떠나 보내기로 결심하고 조금씩 잊어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날도 저는 위에서 말한 왈칵 올라오는 생각을 잊으려 조깅을 하고 샤워를 한 후에 기분이 좋아져서 침대위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양손을 배꼽 위에 모으고 기분 좋은 생각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자 또 "왈칵 왈칵"이 시작되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소와는 다른 방법을 써 보았습니다. 그냥 한 번 이 감정을 느껴 보기로, 그리고 그냥 실컷 그 사람 생각을 해보기로, 가능하면 내 감정을 소리내서 말 해보기로...


 그리고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 솔직해지자. 그는 멋진 사람이었어. 나에게도 아주 잘 했고. 그런데 내가 잘 못 해서 놓쳤지. 아니 그의 행동과 말을 보면 처음부터 그는 우리 관계를 그렇게 깊게 생각 안 했을 거야. 그는 잘 생겼어. 웃는 모습이 근사해. 그냥 혼자 딴 생각 하다 피식 웃는 모습에도 설랬지. 가진 것도 없는 그를 나 아니면 누가 이만큼 생각할까? 라는 건 거짓말이야. 누구든 그를 알아 볼 거야. 그를 좋아할 사람은 아주 많아. 인품도 정말 훌륭하거든, 허세도 없고. 솔직하고, 진솔해.

  그에게는 금방 더 좋은 사람이 생기겠지.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기 훨씬 전에 그는 더 멋진 사람을 만날 수도 있어. 그녀는 나보다 더 예쁘고 어리고 똑똑하고 사려 깊고 매력이 많을 거야.  그리고 그는 그 사람 품안에서 행복할 거고. 내게는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표정이나 열정, 애정 표현을 그녀에게 할 거고, 그는 그녀를 아주 행복하게 해 줄 거야. 지금 큰 돈을 벌지는 못 하지만 성실하고, 주변의 모두가 그를 좋아하니까 어쩌면 5년 후 10년 후에는 성공 할 수도 있지. 혹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과 결혼 할 수도 있고. 그는 나를 떠나서 훨씬 행복할 거야..."


 이렇게 중얼 거리는데 신비롭게도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 마다 마음이 한 결 편해지더군요. 그리고 다시 이런 말을 해 보았습니다.


 " 그를 잃은 건 정말 내게 힘든 일이고, 큰 상실이고 결핍이야. 하지만 다음에는 결코 놓치지 않을 거야. 놓치더라도 같은 이유로 놓치진 않을 거야."

그리고 여기 다 쓸 수는 없지만, 그와의 일 중 후회되는 일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면서 "다음에는....하겠어"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났더니 이제 "왈칵"이 찾아 오지 않네요.  뭔가 희망 비슷한 것도 생겼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할 걸 인정하는게 저의 경우에는 치유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괜히 먼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경험이었습니다.  


  

    • 뭔가 치유되는 글이네요. 쿨내가 납니당.

      • 적고 나니 엄청 개인적인 넋두리라서 살짝 후회했는데, 치유가 되는 글이라니 감사합니다.

      • 투게더님 일단 힘내시구요

        근데 그사람이 좋은사람이고 어쩌고 그건 그사람 사정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사셔야죠. 그냥 내가 더 멋진사람이 되자구요 그냥 제가 제 스스로한테 하는 말 ㅜㅜㅜㅜ

        더 멋진 사람 만나셔서 지금 이 사람은 꼭 잊을수있기를.
      • 저야말로 어른 아직 못 됐어요. ㅠㅠ 저도 "그는 다른 사람 품에서 행복 할 거야" 라는 부분에서는 울컥 했었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빨리 마음이 나아서 together님이 "아...맞다 예전에 그런 일도 있었었지. 후훗" 하고 그냥 덤덤하게 회상하는 날이 오길 바랄게요.  

    • 삼각함수가 벼락같이 닥쳐왔던 시절, 수(학)포(기)자로 시작해 매년 포기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자로서 무척 공감합니다. 아래의 경험도 조금 비슷하고요. 아직 완벽히 치유되진 않았지만 저도 이번만큼은 신포도 전략을 택하기보단 현실직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네, 한결 낫네요.:)

      • 삼각함수...수포자...친근감이 드는 말이네요~^^. 저는 그런 상상을 했어요. 파스 붙였다 뗄 때 아픈데, 살살 조금씩 나눠서 떼어내느냐, 확! 뜯어내느냐..., 전 후자를 택한 거죠.

    • 참 현명하게 마무리해가세요.. 전 정말 미쳐가지고 반응도 없는데 혼자 난리치다 정리해가고 있습니다. 참 제가조울증 환자처럼 군것도 있지만 그녀도 참 독하고 차갑더군요.. 이별후 사람이 그렇게 차갑게 변한단걸 처음 느꼈네요.. 그녀 말대로 괜히 전화했습다.. 그녀는 애원하며 받아달라는 나의 선물을 반송했고.. 열어본 흔적이 있어 메모라도 하나 있을까 했지만 그런건 없었고.. 자길 그리워 하는 나의 마음이 아깝다며 다른 사람 주라고 하더군요... 널 못잊겠다란 나의 말에 우린 그런게 아니라는거 아는 나이잖아요.. ㅎㅎㅎ 정말 안맞는 인연이였나 봐요... 전 제가 할수 있는 온갖 찌질한 짓을 다 하고 참 더러운 꼴 당하고 잠잠해져가고 있답니다...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7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1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9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8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7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3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