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감정을 고스란히 끌어안기

행복한 순간은 불안을 동반하는 것 같았어요. 이것이 깨지면 어떡하나, 그때의 균열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우울과 불안도 그렇게 처리하려 했죠. 언제나 감정은 양면적이야, 이 시점이 지나가면 이후론 웬만해선 편안하겠지 하면서요. 어떠한 감정이 몰려올 때마다 거기 100% 몰입하는 대신 슬쩍 피해가거나 인지로 처리하는 전략을 쓰다보니 온갖 희로애락에 초연해지데요. 인생이 지루하고 시시해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평온했습니다.

그러다 올 여름, 참으로 오랜만에, 밀려오는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험을 시도했습니다. 재생불가능, 지속불가능한 행복의 순간을 맞이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 기회에 내재한 불안과 한계를 알면서도 일단 취하고 보는 걸 택했고, 짧은 시간동안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 힘으로 정상적인 일상을 더 잘 꾸릴 수 있을 거라고도 믿었지요.

그런데 이게 웬걸, '그리움'이라는 막강한 감정이 늦여름의 저를 잠식해버렸어요.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을 떠올리며 우울해하고만 있습니다. 이것이 두려워 지난 수년 동안 제 감정에 정직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제거하려고만 애썼던 거죠. 감정처리에 취약한 저를 새삼 발견합니다.

감정을 온전히 끌어안고, 담아내고, 거기에 머물러있을 수 있는 분들. 많이 계인가요? 기쁨도 우울도 황홀감도 좌절감도, 내게 오는대로, 굴절시키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분들이요. 감정을 인지로 처리하는 능력보다, 감정에 직면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태도에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전자에 힘이 필요하다면 후자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고나 할까요.
    • 그렇게 야무지게 모른척 하려고 맘 먹은적도 있었죠.


      그런 양쪽의 순간들이 없다시피 살다보니


      마음의 짐을 지고 싶습니다 무거워도 오래 걸어도.

      • 제가 그랬습니다. 무거운 짐일지언정 져보자고. 그러고는 감당 안돼서 쩔쩔매는 형국이라니..^^
    • 긍정적인거야 큰 상관없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굴절시키거나 자기 나름대로의 버퍼가 없으면 어지간한 멘탈갑 아닌이상 못버티죠. 둘 다 온전히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야지 왜 사서 고생을.... 그러니까 사람에겐 방어기제라는것도 있고 자신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한 온갖 장치가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다만 부정적인 감정을 효과적으로 해소하는 건 혼자서 처리하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한듯 합니다.

      • 듣고보니 그렇네요. 방어기제를 마치 내 안에서 제거해야 할 장애물인 것처럼 여겼다는 자각이 드네요. 이 경험에서 얻은 긍정적인 것만 떠올리도록 노력해야겠어요!
    • 희노애락에 초연해지면 공허가 찾아오지 않던가요


      사실 기쁜 일에 기쁠 수 없는게 얼마나 오래 살아봤다고


      그 다음 일이 너무 불안한겁니다




      사실 감정처리 하니 체스에서 지고 난 뒤 제 감정을 떠올려봅니다


      내가 악수를 두었다는 것 때문이기도 하고요


      내가 바보같았다는 것 때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복기해보면서 희망을 보지 않겠습니까


      희망을 보도록 해요



      • 맞아요. 지금 이렇게 기쁘다간 닥쳐올 불행에 무너질까봐 하는 불안이에요. 오랜 시간 공허했죠. 그걸 벗어나서 좀 채워짐을 느껴보고자 했더니 채워진 게 빠져나간 뒤의 허탈감이 또..^^ 어렵네요 이것참 하핫. 체스는 안해봐서 모르겠지만 뭔갈 하고난뒤 내가 바보같았다는 생각으로 괴로운 감정을 없애기 위해 자꾸 방어기제 발휘했던 기억이..ㅎㅎ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6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0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8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8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7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3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