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아이와 아빠의 유럽여행

신문에서 '잊지 못할 휴가'라는 주제로 기고 의뢰를 받아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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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7살, 5살짜리 두 딸과 셋이서 유럽여행을 했다. 사정상 애 엄마는 함께 갈 수 없게 되었는데도 걱정 말라고 큰 소리를 치며 떠났다. 출발 전 밤마다 열심히 공부하여 상세한 일정을 짜고, 아이들에게 사전 교육으로 사운드 오브 뮤직, 로마의 휴일을 보여 주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혔다. 평생 언제 아이들과 여기를 다시 올까 하는 생각에 미술관, 박물관, 유적지 등 남들이 좋다는 곳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자동차를 렌트하여 트렁크에 전기밥솥, 참치캔, 김, 카레 등을 싣고 다니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밥을 해 먹었다. 슈퍼에서 쇠고기를 사다가 밥솥에 넣고 라면스프를 뿌려 버튼을 누르니 묘한 수육이 되더라.

야심차게 로마에 입성했다. 땡볕에 포로 로마노를 걷고... 걸었다. 시저라도 된 양 감회에 젖어있는데, 큰애의 한 마디. “아빠, 무너진 돌 무더기를 왜 자꾸 봐야 해?” 돌아보니 두 아이 모두 볼이 빨갛게 익고 머리는 산발. 여자 아이의 머리를 종종종 이쁘게 묶는다는 것은 내 둔한 손으로 피에타를 조각하는 것과 같은 일이기에 늘 긴 생머리였던 것이다. 지치고 짜증난 둘을 젤라또로 달래며 바티칸 박물관으로 향했다. 인류의 보물이 가득했지만, 인류도 가득했다. 키 작은 아이들의 눈높이에는 땀에 전 중국 단체 관광객의 복대 밖에 안 보였다.

그날 밤 민박집에서 지쳐 쓰러진 아이들 머리맡에 앉아 자책했다. 유럽에 원수진 것도 아닌데 왜 생전 다시는 안 오는 걸 목표로 클리어를 하고 있을까. 지루박 강습도 아닌데 왜 찍고 턴만 반복하고 있을까. 여행은 숙제가 아니다. 하루 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중요하지 무슨 거창한 목표 완수가 여행의 목적이 아니다. 아마 인생도 그럴 것이다. 위약금을 물며 미리 예약한 숙소를 다 취소했다.

로마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천천히 달리며 무조건 아이들이 서자는 곳에 섰다. 그 결과 ‘내가 사랑한 유럽 시골 놀이터 탑 10’, ‘유럽 미끄럼틀 어디까지 타 봤니’를 쓸 지경이 되었다. 이름 모를 시골 동네 놀이터가 보이면 무작정 멈춰서 아이들이 싫증날 때까지 놀았다. 딸들은 첨 보는 동네 애들과 각자 자기나라 말을 하며 모래놀이를 했다. 아이들은 바벨탑을 쌓기 전의 세계와도 같다.

서울에도 있는 놀이터인데 시간이 아깝지 않았냐고? 서울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놀 때는 내가 없었다. 머나먼 이국이지만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있다. 게다가 덤으로 어딘지는 모를 작은 동네지만 멀리 알프스가 보이고, 동네 개천은 물이 맑아 물고기가 헤엄치고 백조가 떠 다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진은 아래 페북에)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307632519416090&set=a.307632512749424.1073741828.100005080337790&type=1&permPage=1

 

    • 정말 따뜻한 글입니다. 따님들은 복도 많지, 이런 아버지랑 놀고!


      놀이터 여행기도 좋네요. 분명 한국과는 많이 달랐을 텐데..


      유럽여행은 아이들에게는 별로라고들 합니다. 자기들이 관심갖고 책도 보고 난 후에 적어도 고등학생시절에 혼자! 가야 하는 듯해요.


      저는 신혼여행을 유럽으로 갔었는데 더 젊었을 때 혼자 올걸 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답니다...



      • 제가 복이 많지요.

    • 이거 정말 좋네요. 시간과 비용 탓인지 이른바 뽕을 뽑아야한다는 강박이 알게모르게 이는데 따님들과 즐겁게 여행을 마치셨군요.
      •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려다 오히려 고통만 극대화하기 쉽죠

    • 자동차 로드트립을 하셨군요. 저도 가족과 함께 한 달 정도 차 렌트해서 유럽 돌아 다녀 보고 싶어요.  
      • 피난민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실 것임

    • 좋은 글과 사진이네요. 저도 애들 데리고 여행을 많이 다니는데 요즘 비슷한 고민을 하던 차였습니다. 저도 우리집 여행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네요. 고맙습니다.



      • 아이들 어려서 많이 데리고 다니실 때가 행복한 겁니다. 부럽네요

    • 휴가철에 휴가는 못가고 예전 휴가 사진만 보고 있네요. 지금의 아이들도 물론 사랑하지만 이 시절의 아이들이 그리워요. 아이의 어린 시절이란 돌아오지 않으니 다들 마음껏 사랑해 주세요. 링크된 사진첩에 사진 두 개 더 올려놓았습니다.

    • 헉. 조선일보 보다가 명량 성공을 신나게 분석하는 기사 옆에 있던, 나의 잊지 못할 휴가라는 소박한 주제를 달고있던 글이 있더라고요. 눈길이 닿아 읽다보니 참으로 맘이 따뜻해지는 좋은 글을 봐서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스크랩까지 할정도. 이 게시글 제목보고 혹시?해서 클릭해봤는데 필자분이 여기 계셨군요!!
    • 참으로 보람차게 놀다 오셨군요. 남들 다 들르는 데로 가 봐야 남들 구경 실컷 하고 올 뿐이죠.

      • 쿠융훽님 오랜만입니다. 언어학 관련 문제를 만날 때마다 님이 생각나더군요. :)

    • "서울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놀 때는 내가 없었다"라는 말이 참 와닿습니다. 아이가 제일 예쁘고 귀여울 때 남편이 바빠서 많이 못보는게 안타까웠던지라...


      미취학 아동의 귀여움은 가끔 상상을 초월하니까요. 물론 그들과 함께 있을때의 피로도도 상상을 초월하지만요.^^;;;;; 

      • 그 때 그 아이를 만나고 싶어서 가끔 슬퍼져요. 물론 지금의 아이도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 시절 그 작은 아이는 다시는 만날 수 없잖아요..

    • dmajor7님의 글을 만나는것이 듀게를 눈팅하는 큰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 고맙습니다. 물론 다른 분들도.

    • 오랜만에 가슴 따뜻해지는 글을 읽네요. 딸들에게는 즐거운 추억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네요^^

      • ... 저만 다 기억하고 애들은 많이 기억 못해요. 그래도 기억하든 못하든 그때 같이 있었던 시간이 소중해요. 아빠가 엄마라는 존재 없이 딸들과 하루종일 밀착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흔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이 때 아이들의 사진을 들여다볼수록 아이를 잃은 부모님들의 심정이 어떨지, 특히 딸을 잃은 아빠의 심정이 어떨지 느껴져서 가슴이 미어지고 죄스러워져요...    

    • 네 그렇습니다.


      클리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이들도 커서 아버지의 이해가 대단했구나 하겠어요.





    • 카파도키아 어느 케이브호텔 테라스에 앉아 전경을 바라보면서 이 글을 읽고 있어요.


      (회사 이메일 체크한다고 컴퓨터를 켰지만) 이 글을 읽고 고개를 들어 풍경을 보니 기분이 더 여유롭고 행복해지네요. 좋아요! 만세!

      • ㅋ 낼 새벽 벌룬 투어 가시나요 좋은 날씨되시길

    • 역시 라면스프는 만능양념


      소고기가 야 너 오지마 첨엔 그러지만


      금방 사이좋아지는

      • 역시 제 산문적 감수성은 가영님의 시적 감수성에 미치지 못한다는..

    • 우와, 너무 좋은 글입니다.


      사실 저도 딸이 다섯살만 되면 둘이서 한번 여행을 가볼까 했는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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