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리+파주 출판단지 산책 단상들

 

며칠 전  약속이 있어서 파주 출판단지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남아서 헤이리에 잠시 들렀다가,  점심 먹고 출판단지 가서 산책을 좀 했지요.

 

헤이리는 주중 낮에는 무척 한가하더군요.

시간도 별로 없었고, 너무 적막한 분위기에 별로 흥도 안나고 전시회를 여유롭게 볼 컨디션도 아니어서,

헤이리 안에 있는 빵집에서 방금 구운 포카치아와 치아바타를 사서 좀 돌다가 나왔습니다. (빵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그밖에 한 일은, 오픈한 지 얼마 안됐다는 가죽 전문 샵에서 가죽 안틱 안락의자와 넓다란 원목 책상 가격을 괜히 물어본 게 다였죠.

 

헤이리 '마을' 이랬는데, '마을'다운 분위기가 별로 안난다고 할까요. 건물도 특이하긴 했지만, 하나같이 회색+블랙+나무색 조합에 모던해서

흐린 가을 날엔 을씨년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더군요. 주말에 오면 좀 다를까 싶지만,  꼭 봐야할 전시나 프로그램이 없다면 굳이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은 안 들더군요.

뭔가 좀 예술입네~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모던한 건물들이 한데 다닥닥닥 모여있으니, 뭔가 좀  하여간 이상하게 불편했어요.

 

 

파주 출판단지는 그 특유의 을씨년+모던한 분위기가 제법 그럴듯한데 말이죠. 저는 출판사와 인쇄소와 물류창고가 함께 붙어있는 그 광경이 왠지 모르게 보기 좋아요. 

뭔가 책 생산 과정의 단면도를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요. 특히 인쇄소의 기계들과 물류창고 안이 들여다보일 때가 제일 흥분됩니다. 하긴 저는 옛날부터 공장지대를 구경하며 지나치는 걸 좋아했어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메커니즘이 조금이라도 내 눈 앞에 펼쳐지면, 뭔가 대단한 것을 알게 된 듯한 기분에 휩싸입니다.

 

 하여간 전 근미래의 도시 같은 출판단지의 인적 없는 길을 유일한 인간 생존자라도 된 듯 엄숙하게 홀로 걷고 있었어요.

 어느 출판사 건물의 3층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출판사 편집인처럼 보이는 이와 시선이 마주쳤을 땐, 흠칫 놀라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저는 약속 시간까지 기다릴 까페를 찾고 있었는데,  까페는 보이지 않고,  그런 곳에서 만날 거라 생각지 못했던 익숙한 간판의 글자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숨어 있는 책'.  제가 옛날에 다녔던 헌책방의 간판이었어요.  

 

 그 순간 그야말로 미래에서 과거로 극심한 시차의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어요. 아니, 문단이 채 바뀌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소설 장르 자체가 바뀌어 당황한 소설 속 주인공 같다고나 할까요. 무언가에 이끌리듯 저는 따뜻한 KBS 클래식 FM 이 흘러나오는 책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전에 신촌 책방에서 지하를 지키던 청년이 책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책방에 안 간 지 꽤 되어서, 저간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책의 양이 많지 않은 걸로 봐서는 분점인 것 같더군요.  예전에 제가 망설이다 그냥 두었던 익숙한 책등의 책들을 발견한 저에게는 공간이 옮겨진 게 아니라, 시간이 옮겨진 것 같았어요.  해가 지기 전 늦은 평일 오후, 오롯이 혼자였던 시간이,  감정과 의지의 어떤 맥락을 그날 우연히 발견한 어떤 책이 맺어주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품을 만큼 흔들렸던 하루가.  

 

며칠 전 진보초의 헌책방에서 문고판을 고르던 관성이 아직 남아 있어선지, 책장 꼭대기에 올려져 있던 삼중당 문고에 자꾸 눈이 갔습니다.

삼중당 문고에 대한 추억이 있을 만큼 제가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저는 옛날 문고판으로 고전을 읽으면, (번역이 이상해도) 묘하게 잘 읽혀서 헌책방에 가면 문고판을 살피는 편이기는 합니다만.

약속 시간이 다 되어 헌책방을 나오며, 마치 나의 옛 시간을,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기억을 거기에 두고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이를테면 근미래의 도시 한 가운데 떠 있는 시대착오적인 등대 같은 헌책방의  책장 꼭대기에, 위태롭게 놓여 있는 삼중당 문고 같이, 낡고 누렇게 바래고 곧 바스라질 듯 허약한 어떤 형태로.

 

귀가길에 헤이리에서 산 빵을 씹고 삼중당 문고로 카프카를 읽으며, 낯설고 다시 가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장소에 익숙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게 괜시리 서글프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다행스럽기도 한 기분이었습니다.   

 

 

 

  

      

 

   

 

 

    • 일 때문에 헤이리를 집처럼 드나든 지 꽤 되는데 저도 '여기 너무 싫다'는 생각이 참 오래 갔죠. 예술인이 왜 마을을 만들까? (사회 경제적 배경, 폐쇄성이 느껴지-고 또 듣기도하-면서 순수하게 안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런 의문부터 시작해서 말씀하셨듯 뭔가 출몰할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그렇다고 경제적인 것에 그렇게 초연하지는 않은 모습 등. 실체가 잘 안 잡히는 곳이죠. 근데 지금 느끼는 것은 그런 미로 같은 모습이 그 곳의 매력인 것 같아요.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들여다보면 들려볼 만한 곳도 의외로 많고; 며칠 전에는 지금 와서 저런 마을을 만든다고 하면 그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런 호화; 전시관 건물들을 지을 때엔 얼마나 희망에 차고 풍요로운 마음이었을까...
    • 우어...신촌에서 헌책방을 지키던 청년을 예상치 못하게 다시 만나다뇨! (분점이긴 하지만, 그건 제쳐두고.)
      헌책방 청년이 아니라 헌책방 누구였대도 은근 반가웠을 것 같아요.
      구태여 서로 인사는 하지 않지만, 무심코 한 마디 던지는 말에서 기억하고 있음을 캐치한다던가!
    • abneural/ 네 뭔가 그런... post factum, after the event, 서커스가 끝난 다음 날 같은 분위기가 났어요. 자생적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해간 마을이 아니라 섬처럼 고립되어 웃자라다 꺾여가는 생태계 같은 묘한 분위기도 있고요. 불편하긴 하지만 독특한 매력은 있었습니다. 답글을 보다보니 눈 내린 겨울에 한번 다시 여유 있게 찾아가볼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선/ 이전이나 지금이나 (손님이 먼저 말하기 전에) 손님을 알아본다는 낌새를 전혀 내보이지 않는(실제로 제가 그렇게 알아볼 만큼 인상적인 단골도 아니었고요.), 손님 입장으로서는 매우 운신하기가 편한 헌책방 직원의 매너를 갔고 있는 그 청년이었죠. 항상 보면 책을 보고 있거나 공부를 하고 있어서, 손님에게 불필요한 관심이나 시선을 주는 일이 없는 청년이고요. 까페나 음식점과는 달리, 특별히 부가의 서비스를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닌 책방(그것도 개인의 전공이나 관심사가 확연히 드러나는 단골 헌책방)의 손님과 직원은 관계는 자고로 그래야 편하더라구요. 눈이 벌개져 고른 책들을 카운터에 내려놓으면 뭔가 발가벗는 기분이라;;;; (그래도, 나중에 집에 와 산 책 가격을 계산해보니 한 1000원은 깎아준 것 같던데... 고마웠습니다. ^^)
    • 제가 다니던 도장의 사범님이 어느새 헤이리로 가셨더군요.
    • 거기 황인용씨가 운영하는 음악감상실이 꼭 가보고 싶던데요...
    • 어머, 숨어 있는 책이...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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