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게에서 뭐 할일없는 분 있나요


  몇 번인가 각각 다른 닉네임으로 백수클럽...은퇴자 클럽같은걸 모집했는데 잘 안됐어요. 일요일 밤인데 남아있는 시간이 잘못 쌓여진 테트리스 블록처럼 너무 많네요. 17살 때의 나에게 이 엄청난 시간-과 약간의 돈-을 선물해주고 싶어서 열심히 살았는데...정신차려보니 17살 떄의 나는 사라졌기 때문에 전혀 즐겁지가 않네요. 17살 때의 나라면 당장 잠들고 내일 낮에 맛집에 가서 짜장면 곱배기랑 탕수육을 시켜먹고 노량진 오락실에 가서 동전을 쌓아놓고 격투게임을 하며 재미있게 보낼텐데...지금은 아무것도 단순하지가 않군요.


 엔하위키에서 경기도 권에 있는 대학들 목록 링크를 쭉 봤어요. 평택대 강남대 세한대 뭐 이런 곳 말이죠. 다시 학교를 간다면 서울에 있는 학교보다 의외로 그런 곳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조용하고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학교 말이죠. 세상이 관심없어하는 그런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밥 먹고 그러고 살면 지금보단 나을 거 같아요. 사실 지금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대학생이라는 라벨이 붙으면 기분이 좀더 나을 거 같아요. 어느날 학교를 갔는데 휴강이라서 기뻐하면서 게임방 가고 방학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그러는 거 말이죠. 어딘가에 갇혀서 뭔가 좋은 일을 기다리면서 사는 건 정말 좋은 거 같아요. 해방됐다가 다시 갇히고 해방됐다가 다시 갇히고를 반복하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 같아요.


 에버랜드 가고 싶네요. 에버랜드 못가봤어요. 에버랜드에 가서 사파리 관광을 하다가 사자를 마주치면 "너는 삼성 직원일 뿐이지만 나는 백수의 왕이지."라고 한마디 해 주고 싶어요. 에버랜드에 있다는 그 나무 롤러코스터도 타보고 싶어요. 아니면 뭐 롯데월드도 좋고요. 지금이라면 웃으면서 롯데월드 바이킹 뒷자리를 즐길 수 있을 거 같아요. 아주 옛날에 타봤던 신밧드의 모험도 타보고...뭐 그러고 싶네요.


 휴.


 흉가체험도 해보고 싶네요. 사실 예전에 듀게에서 흉가체험 하러 가자고 얘기가 나왔다가 사그러들었는데...그레이브 인카운터 같은 흉가체험 해보고 싶네요. 그곳이 정말 무서운 곳이라면 좋을 거 같아요. 우울함을 순간적으로라도 잊게 해 줄 공포 말이죠. 새로나온다는 제임스 완 공포영화 보려면 아직도 3개월쯤 기다려야 하는데...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네요.

 

 아참 뭐 밑져야 본전이니 듀게모임 홍보 해 보죠. 빌어먹을 시간이 너무 많고 할 일도 없는데 새벽 2시에 심야영화 보러 가거나 애프터눈티세트 먹은 다음에 대낮부터 샴페인이나 들이킬 분이 있으면 좋겠네요. 아참 어디 멀리 갈 때 차몰고오면 초 우대합니다. 흉가체험을 가든 에버랜드를 가든 전라도 어디 구석에 있다는 맛집을 가든 강원랜드를 가든 기름값에다가 모든 식비 모든 비용(자고오는거면 숙박비포함) 모조리 면제.


 "야! 오늘 휴강이래!"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던 건 타이포그래피 시간이었어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3학년 때 타이포그래피 시간엔 그렇게 많이 듣지 않았지만 2학년 땐 압도적으로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떤 시간이든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알수 없는 고양감이 들면서 자유를 얻은 기분이었어요. 사실 그래봐야 별 거 없었어요. 남들은 그 자유를 가지고 다같이 술을 마시러 가거나 하는 뭔가 할 것이 있었지만 제가 할 일이라곤 집에 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 것뿐이었거든요. 그래도 신났어요.







 

    • 새벽두시 심야영화모임 땡기네요. 은퇴는 아니지만 잠시 퇴직자 신분이라.
    • 흉가체험에 참가하긴 겁나는군요. 제 캐릭터가 호러 영화라면 두 번째(는 좀 아닌가?)나 세 번째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서, 다행이 애인은 없으니 쌍으로 죽을 일은 없지만요. 한국에서 기대하시는 모임이 실제하기 위해선 어떤 전제가 따라야 하는가, 를 생각해보는데 참 어렵군요. 시간이 많고 해야할 일이 없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만 해도 확 줄것 같아요. 시간이 많으면 아마 그 사람은 여유가 없을 것이고, 할 일이 많은건 부가설명이 없어도 되죠. 거기에 여가를 즐길만한 자원까지 있는 사람은 흔하진 않을 꺼에요. 생각나는 군집은 수능끝나고 점수 나오기 전까지와 (이도 여러 조건이 또 있긴 하지만) 마지막 대학 합격 발표가 난 고3, 첫 방학을 맞은 대학생, 군대 입대하기 전에 잠깐 휴학한 대학생, 이직에 성공하여 출근을 기다리는 독신 직장인, 자발적인 여유기간(과연 존재할까?)에 돌입한 프리랜서 정도네요. 한국의 평균적인 은퇴자들은 퇴직금으로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사업전선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대다수고, 이런 은퇴모임에 참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이런 모임이 여러 개 있을 거라는 생각과, 그런 모임에 적합한 웹 커뮤도 존재할 거란 생각은 들지만 듀게는 좀 거리가 멀겠죠.

    • 시간은 많고 해야 할 일은 하고 싶을때 할 수 있지만, 그만큼 금전적 여유도 포기하는 삶이라 여가는 가능한 소박하게 지내지요.

    • 은퇴자는 아니지만 애프터눈 티세트는 먹으러 가고 싶습니다 ㅎ

    • 어머 저 백수에요. 애프터눈티세트에 샴페인 좋아요!
    • "어딘가에 갇혀서 뭔가 좋은 일을 기다리면서 사는 건 정말 좋은 거 같아요. 해방됐다가 다시 갇히고 해방됐다가 다시 갇히고를 반복하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 같아요." 재밌네요. 꼭 참형사에서 우주는 flat circle이라서 갇혔던 아이들은 다시 갇히게 될거라는 대사 비슷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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