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본 후
그리 대단한 감동을 주지도 않은 이 영화를 참 아름다운 영화로 기억하는 이유가 뭘까?
환상적인 화면에 얼이 빠져서? 애니메이션 같은 추격씬의 속도감에 취해서?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제법 쿨한 관객이 되어 감정의 동요 없이 주인공의 모험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그저그런 영화의 뻔한 장면에도 쉽게 놀라고 쉽게 눈물 흘리는, 쉬운 관객인 나에게는 꽤 드문 경험이었다.
(어떤 이의 손가락이 잘리고 어떤 이의 머리가 잘려진 장면에서도 잠깐 "어.." 하다 마는 쿨함이 드디어 내게!!)
드미트리의 팔자 눈썹과 날렵한 콧수염, 조플링의 주걱턱과 반지, 가죽 코트까지
악당들조차 각자의 세련되고 개성적인 스타일로 만화같이 등장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당연하다는 듯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에
나는 어쩐지 그들을 제대로 미워할 수가 없었다.
악당조차 우아하고 멋진, 유쾌하고 아름다운 세계
고통과 슬픔의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깨끗하고 정돈된 세계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 동화 속의 세계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영화
나에게 감정적인 개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나를 그 세계의 건너편에 못박아 놓았던 이 영화가 끝난 후
나는 그 아름답고 우아한 세계로부터 분리되고 싶지 않다는, 이상하게 그리운 느낌에 잠시 젖었다.
누군가의 죽음조차 슬쩍 흘려보내는 이 영화의 가벼움이 나는 어쩐지 싫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때에만, 한없이 가볍고 유쾌해질 때에만, 그림처럼 아름다워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