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 게이트란 게임 아시나요? 다시 해봐도 감동이네요

컴퓨터 게임좀 해봤다는 20대 이상의 남자들이라면 아마 한번쯤 해봤을 게임일듯? 고등학교때 처음 할때는 언어의 장벽때문에 스토리도 모르고 옛날 일본rpg게임 하듯이 막 했는데 그래도 재밌었죠. 나중에 한글패치를 해서 한번 더 즐겼고 최근에 또 엔딩을 봤는데 할때마다 참 훌륭합니다


원래 세계관 자체가 이미 탄탄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D&D의 포가튼렐름이기도 하지만, 스토리가 참 멋집니다. 악과 타락의 숙명을 타고난 주인공이 자기 운명을 거슬러 극복해나간다는 얘기는 고전적이고 전형적이지만, 그럼에도 계속 반복된다는건 그만큼 매력적인 서사이기 때문이겠죠.


이번에 할때는 예전에는 생각못했던 부분에 주목하게 되더라구요. '아버지'와 '상속'이라는 것.. 주인공에게는 낳아준 바알과 길러준 고라이언 이렇게 두 아버지가 있는 셈이죠. 이 게임의 3부에 걸친 이야기는 결국 전자인 바알의 상속권자인 주인공이 형제들과 순위경쟁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상속권은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가 배려를 해준게 아니라 자신의 부활을 획책하기 위해 마련한 미끼에 불과하고, 주인공은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형제들'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맞서는 것이긴 합니다만..


게임의 재미로 보자면 2편이 제일 낫지만, 이야기의 매력은 마지막 3부격인 확장팩이 제일 좋았던거 같아요. 1부는 자기 피의 오염의 실체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대체 누가 날 이렇게 괴롭히는건가ㅠㅠ'하며 서서히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이고, 2부는 주인공이 손에 넣을 가능성이 있는 그 엄청난 유산을 빼앗아서 한탕을 해보려는 악당과의 투쟁이라면, 3부에 와서 비로소 '그럼 내가 상속자가 되어야 하는걸까?'의 고민을 하고 선택을 요구받는 것이지요. 


3부의 이야기는 특이합니다. 이미 신들은 이 상속후보자들의 경쟁에서 누가 이길지를 알고 있습니다. 신들이 궁금해하는건, 그 후보자중 이길 예정인 주인공이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입니다.  주된 내용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최강의 다섯 형제들을 한명씩 격파하는 것이지만, 한명을 죽일때마다 바알이 군림했던 차원으로 소환되서 어떤 의식을 치르게 되죠. 신의 사자가 찾아와서 끊임없이 여러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단순히 아이템을 모으고 레벨업을 해서 적을 죽이는것 말고도 적게는 2~3개에서 많게는 10개가까운 대화 지문을 고르는 것도 이 게임의 중요한 요소죠. '도대체 넌 어떤 인간이냐'를 확인하고 쌓아가는거죠.


원래 평범한(?) 바알의 자식이라면 어떻게 살다가 죽을지가 정해져있습니다. 약한 자라면 시골에서 살인강간이나 하다가 법의 철퇴에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고, 강한 자라면 '내가 바알의 왕좌를 물려받아야겠다'는 야심을 품고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대악인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주인공만은 이질적입니다. 왜냐면 또다른 아버지인 양부 고라이언이 개입되어 있다는거죠.


원래는 이미 1부 시점에서 똑똑하고 힘도 쎄고 킹왕짱인 유력 상속후보자 사레복에게 끔살당하고 시체도 못찾아야 하겠지만, 비밀결사의 조직원이고 명망높은 고라이언의 친구들과 동료가 되고 그들과 모험을 하면서 성장한 주인공은 사레복에게 승리합니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남긴 잠재력이라는 엄청난 유산에 비해 초라해보이지만, 이것도 아버지의 유산인 셈이죠. 더불어 양아버지의 양육....


사실 고라이언이 끼친 영향은 자세하게 묘사는 안됩니다.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죠. 고라이언의 부성을 조금이라도 더 묘사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어쨌든, 이 불쌍한 옛 연인의 사생아를 어떻게든 칼 대신 펜을 쥐어주고 평범하게 살게 하고 싶었던 고라이언의 양육과, 죽게 될 운명인데도 어떻게든 살리려고 친구들에게 맡긴 발버둥이 주인공을 바알의 자식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만든 것이죠


마지막 순간에 이르는 과정이 참 드라마틱합니다. 1부에서는 전쟁을 일으켜 대살육의 혼란을 유도하려던 악당을 처치했지만 '저놈도 그 바알의 자식이래'라며 손가락질 당하며 반 타의로 고향을 떠나야 했고, 2부에서는 희대의 악당캐 이레니쿠스를 제거하고 요정왕국까지 구했지만 이젠 너무나 거물이 된 주인공을 노리는 다른 바알의 자식들의 표적이 됩니다. 3부에서는 군벌 장군에 드래곤까지 출동하는 말도 안되는 적들을 쳐부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세상 사람들의 의심과 혐오가 깊어지고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져 군대의 공격까지 받죠.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지만, 강해질수록 더 큰 위협에 직면하는 극한에 몰리는데, 그럼에도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누구의 유산을 물려 받을지....


최종적으로 주인공은 마침내 모든 경쟁자들 심지어 자격도 없는 주제에 날름 유산을 먹으려던 바알의 최측근 심복조차도 제거하고 왕좌 앞에 서게 됩니다. 거기서 세 가지 선택지가 나옵니다(물론 게임상 등장하는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했느냐가 관건) 1.(진짜)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악신의 자리를 차지한다 2.신성을 물려받되 선한 신이 된다 3.모두 포기하고 그냥 필멸자로 남는다. 사실 1,2는 선악으로 갈리지만 한 카테고리 안에 있는 바알의 유산인 셈이고, 개인적으로는 3번의 선택이 이 게임의 진(眞) 엔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게 과연 이 게임 팬들의 주류 의견인지, 그리고 게임 스토리를 쓴 사람이나 판권 소유사(-_-)가 인정하는 정사인지는 의구심이 크지만... 적어도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게임으로서의 재미도 재미지만.. 이렇게 나름 스토리를 음미해보는 것도 흥미롭게 느껴지네요.

    • 와, 발더스 게이트의 스토리가 이런 거였군요...


      CD 6장인가로 나온 게임을 사서 자랑하던 친구녀석이 기억나는데,


      그게 한 10년 전 이야긴거 같네요.


      6장이면 DVD로도 1장엔 안되겠네요.

    • 저에게는 미국식 RPG의 재미를 알게해 준 작품이자 20대의 상당부분을 날려 버리게 만든 악마이기도 하지요...


      최근에 enhanced edition이 맥과 아이패드용으로 나왔다고 해서 다시 해볼까 하는 유혹을 참고 있던 와중에 이 글을 읽으니 왠지 주말에 결재해 버리고 말 것 같습니다...
    • 추억 돋는 글이군요 ㅎ




      저는 디아블로2에 발려버린 '녹스'를 하고 싶어요 ㅜㅜ

    • 파릇포실/요즘은 스팀 등 인터넷 다운로드 서비스가 대세이니... 기록매체가 뭐냐는 문제가 안될듯


      세호/이 게임 때문에 정말 엄청난 시간을 날렸죠. 사실은 요즘도 날리고 있는 중..-_-  ee는 의외로 별로 구매욕구가 안생기더군요. 아예 화끈하게 후속작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닥터슬럼프/ 저는 디아2보다 녹스가 좋았습니다. 특히 멀티플레이가 진짜 대박이죠. 해본 사람은 다 압니다ㅠ

    • 게임은 한 번도 안해봤지만 내용이 웅장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감동적이네요.  글을 굉장히 잘 써주셔서 영화 한 편 본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 으앙 녹스 동지님들이!!! 참 좋은 게임이었는데 하필 디아랑 만나가지고....



      전 디아도 했고 디아를 훨씬 오래 하기도 했지만 녹스의 그래픽이 참 좋았어요.



      게임 끊은지 오래됐는데 갑자기 게임 하고 싶네요...



       

    • 게임도 게임이지만 게임에서 반복 플레이로 감동을 우려내는 플레이어도 부럽네요.

    • 발더스 게이트 재밌게 하신 분은 드래곤에이지:오리진을 스팀이나 오리진에서 지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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