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이 부러울 때

지난 주말에 퀴어퍼레이드로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들썩였습니다.
해묵은 동성애 지지/ 반대(?) 논란 부터 일부 종교 단체나 보수단체 사람들에 대한 얘기들도 많았지만
이제는 이성애자들도 열린 마음으로 퍼레이드를  참여하거나 관람하는 분위기로 바뀌는 것도 동시에 확인할 수가 있었지요.


하지만 정작 퀴어인 저는 그 자리에 가 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게이라고 해서 꼭 가야하거나 참여해야할 의무가 있는 건 전혀 아니지만
저도 올 해는 애인과 함께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었거든요.

가지 못 하게 된 이유는 애인이 나름 심각한 수술을 했기 때문입니다.   병원의 위치도 그렇고 애인의 가족들이 애인을 간병하거나 돕기가 애매한 상황인지라
거의 매일 애인 곁에서 간병을 해야 했고요.

가족이라지만 나이가 많으셔서 본인 몸을 챙기기도 어려우신 애인의 어머니나
직장을 나가야하며 자신들의 가족이 있는 애인의 형제들은 사실 큰 도움이나 잦은 방문은 어려웠고,
매일 간병을 해야하는 건 친한 후배라고 그 쪽 가족들에게 알려진 제 몫이었습니다.

오늘로 보름 정도를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병원에 있다가  오는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데
하루 하루 갈 수록  이 쪽으로서의 삶이 많이 버겁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애인과 연애를 한 지 십 몇 년이 됐지만, 너무나도 당연하게  서로의 삶에서 한계를 긋고 그 선을 넘어가지 않고 있습니다.
애인의 가족들에게 저는 앞서 말한대로 그냥 친한 동생일 뿐이고
제 가족들에게 제 애인은 주기적으로 만나는 게임 동호회의 멤버 중 한 명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나이차가 꽤 있기 때문에 다른 설명이나 설정을 붙이기도 어렵거든요.

당연히 둘 다 집에 커밍아웃을 할 상황은 아닙니다. 할 생각도 없고요.
용기가 없다거나 그런 문제보다도... 서로의 부모님들에게 줄 충격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그리고 가족의 상황 들 때문에 아마도 2~30년이 지나도 같이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도 해보질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 상황이 나쁘다거나 힘들다고 여기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이번 처럼 큰 일을 겪어보니
정말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참 부러운 거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하게 됩니다.


지난 주는 연휴가 꽤 좋았던지라 저희 가족의 경우엔 여행을 갔습니다. 일찍이 한참 전 부터 가족들에게 여행 일정이 공지된 상태였구요.

그런데 저는 그 여행에 동참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애인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다 입원을 했고
꽤 심각한 수술을 해야할 상황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 및 형제들에겐 다른 이유를 둘러대면서
함께 가지 못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오래 전 부터 계획된지라 당연히 안 좋은 소리를 들었지만  가족들에겐
저는 평소와 똑같은 즐거운 얼굴로 아무 일도 없다듯이 웃으며 즐겁게 여행 잘 다녀오라고 손이나 흔들어줘야 했지요.

예전에 형제들의 배우자가 건강이 좀 안좋거나 일이  생기면 부모님이나 가족들은 당연히  서로를 걱정하고 챙겨주었지만
저는 오히려 평소와 다른 현재의 생활 패턴 때문에 가족들이 의심을 할까 걱정하며 몰래몰래 애인이 있는 병실을 오가고 있습니다.

형제 내외가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 됐을 때, 다른 가족들이 현실적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시거나  위로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애인이 상태가 매우 안 좋고 갑작스런 장기입원으로 인해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을 까  생계 걱정을 하는데도 
저희 가족에게 제 애인의 존재는 그냥 갑작스런 불행한 일을 겪은 이름도 모르는  온라인 동호회의 한 타인일 뿐이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저는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아는 사람이 이런 저런일을 겪는 다고 지나가듯이 말을 할 뿐이고
돌아오는 말은 무신경하고 당사자들이 듣기엔 상처가 되는 말들이었죠.

수술이 결정 됐음을 문자로 받았을 때,  애인이 있는 병원을 가는 지하철에서 눈물이 계속 흘렀습니다. 
좀 충격적인 결과였던지라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데도 계속 눈물이 흐르고 소리내서 울었습니다.

수술실에서 나오고 거동도 못하는 애인을 곁에 두고 여행을 간 가족들에게  같이 못 가서 미안하다고 전화를 하는 상황이 참 위화감이 느껴지더군요.
만약 제 애인이 저희 집의 사위나 며느리 였다면 이랬을까....  다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여행을 갈 수 있었을까 라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였습니다. 

가족들에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가끔 건너 건너 얘기나 전해듣는 생판 남인 존재가 바로 제 애인이기에
그런 반응이나 이런 현실은 당연한 것임에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매일을 종일 나가 있으면서  어디를 가있는지 무엇을 하고 왔는 지도  매 번 다르게 거짓말을 해야하고
같은 병실의  오지랖 넓은 환자들이나 그들의 가족들이   평범한 지인이 매일 와서 먹이고 씻기고 옆에 있는 모습의 이유를 물어 볼 때마다
설명해야 하는 게 피곤하고 지칩니다.


만약 저와 제 애인이 이성애자라서 모두에게 인정받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이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가족들도, 처음 보는 타인들도 지금처럼  서로를 대하진 않았을 거라는 점은 분명하니까요.




애인과 같이 살지 못 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도 괜찮았습니다.
형제나 지인들이 아이들을 가질 때도 부럽지만  할 수 없는 걸 알기에 또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그리 힘든 상황이고 그 자체로 힘든데 가족이나 주변의 도움을 받기는 커녕
일일히 변명하고 숨기고  아닌 척 하는 게 지칩니다.

저희가 부부였다면 혹은 인정받는 사이였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 커밍아웃을 하고 안 하는 건 물론 철저하게 개인의 선택이지만, 제 경우에는 커뮤니티에 대한 사회적 의무감 때문에라도 가급적이면 하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부모님께는 못 했지요. 평범함이 부러운 건 모든 '평범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심정일 겁니다. 그렇지만 조금씩 바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바꾸는 일에는 무엇보다 '내가' 동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각자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어떤 것이라도. 하나는 약하지만, 함께 모이면 힘이 되니까요. 아무쪼록 애인분 쾌차하시기를 바랍니다. 

      • 말씀감사합니다.

        주변이라고 해도 이젠 사람도 거의 없네요ㅎ


        사실 듀게에서도 예전에 오래 활동을 해왔지만 여기 오는 오프지인들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할 때 만 잠시 닉을 바꿔서 쓰곤 합니다


        일종의 커밍아웃이네요ㅎ
    • 글을 읽어 내려오는데 저도 마음이 아파오네요. 


      애인분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힘 내세요. 

    • 그쪽 커뮤니티를 나가보라는 주위의 조언 아닌 조언을 들을때 망설여지고.. 스스로도 왠지 인정이 다 안되고(제가 인정하기 싫은거죠)..

      그런 이유들이 이 글에 너무 아프게 설명되어있네요. 마음이 많이 아파지는 글이에요.


      저도 그냥 평범하게 이성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싶다(결혼은 실은 하기싫은데 평범하고싶다 라는것에 가까운)라는 생각이 요새 너무 외로우니까 더 들어요.
      • 전 원래 결혼도 자식도 20중반까진 싫었는데


        30중반이 된 지금은 제 자식도 갖고 싶고 애인과 같이도 살고 싶네요


        말씀대로 평범하게 주변과 일상을 공유하고 싶어요
    • 사람과 사람이 사랑하는 일인데 그 사랑 이외의 문제로 그 일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게 정말이지 항상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퍼레이드를 지켜보면서도 그냥 전 '참 보기 좋구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거지?;' 하는 느낌이었는데, 


      그럼에도 그런 이상한 것들이 아직도 세상에는 있는가 보아요.


      천둥도 그친 조용한 새벽에 글을 읽어내려가는데 글쓴분 심정이 너무 잘 표현되어 있어서 가슴이 아팠어요.


      그저 애인분이 어서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 성소수자가 아니더라도

        아직 살기에 불편한 분들이 많으신 걸요


        차차 나아지겠죠ㅎ
    • 애인님이 빨리 나으셔서 함께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 평범하게 산다는 게 정말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 시댁이나 처가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는 주변인들을 보면


        당연히 그 분들도 많이 힘드시겠지만 적어도 양가에 그 존재를 인정 받은 자체가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 사랑하는 분의 쾌유를 빕니다. 힘 내세요.
      • 감사합니다

        힘낼게요
    •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할 수 없다는게 가슴 아프네요.


      애인분의 쾌유를 빕니다.

      • 성격이 불합리하고 그런 걸 못 견디는 타입인지라 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ㅎ
    • 연인님이 어서 좋아지길 빌어 드립니다.



    • 이 글을 쓰는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실지 감히 이해한다고 할 수 없지만, 동시에 이해합니다.

      저는 가끔 애인의 장례식을 상상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단 말이죠. 분명히 애인의 가족들에게 연락한 사람은 나일텐데 '상주'들에게 절하는 나,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는 나, 장지에 따라가도 될까 눈치보는 나를 생각하면 굉장히 우울해집니다. 이게 언젠간 닥쳐올 현실이란 걸 생각하면 더 그렇죠...

      애인분은 쾌차하실 겁니다. 일상으로 돌아간 다음엔 여행 못 간거 투정도 좀 부리시고 내가 병실 지켰다고 생색도 내고 그러세요. 그리고 큰 사건을 겪으셨으니 애인분과 설정한 '한계'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네 저도 종종 생각하는 문제에요.

        서로가 아니라 서로 집안의 대소사에도 힘든 상황이 되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 못 하겠지요


        한계는 말그대로 한계라서

        어찌할 수 없는 거긴한지라...

        바뀔수는 없습니다ㅎ
    • 애인분이 빨리 쾌차하시기를.

      아픈마음 토닥토닥.
    • 단절되었다는 느낌이 너무나 와닿는 글이네요


      사랑하는 분이 아프다는 이유만으로도 힘든일인데 주위 사정이 더 힘들게 만드네요




      애인분이 쾌차하셨으면 합니다.



    • 애인님의 쾌유를 빕니다. 이렇게 걱정해주시니 금방 나으실 거 같아요.


      전 결혼 자체는 쓸모 없다고 생각하지만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게 둘의 관계가 '공인'되고 가족의 일원이 되는 건 필요한 거 같아요. 공동체란게 생각보다 중요하더라구요. 특히 어렵고 슬플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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