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시절, 떠오르는 영화 한 편

다들 그러시겠지만 무수한 언어의 홍수 속에서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나 느끼는 요즘이었습니다.
분노와 슬픔의 무게가 인간의 언어를 압도하는 거죠.
뛰어난 작가 분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쓰신 글을 읽어도 다 동어반복같기만 하고 
아이들의 해맑은 사진 한 장이 전하는 심장에 직접 쿵하고 전해지는 충격과 감히 비할 바 아니더군요.
 
글 읽기와 글 쓰기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느낀 언어의 무력함을 생각하다보니
전에 본 일본 영화 한 편이 갑자기 떠오르더이다.
'행복한 사전'.
 
내성적이고 인간관계에 서투른 언어학 전공 주인공이
출판사의 구석자리에서 사전 편찬 일을 맡아
너무나 행복하게 '언어'의 의미에 대하여 깨달아 가며
무려 10여 년의 세월을 다 바쳐 한 권의 훌륭한 사전을
완성하고, 그 과정에서 사랑, 동료, 친구를 얻어갑니다.
사랑, 우정 이런 흔한 말들의 숱한 의미를 미련스러울 정도로
꼼꼼하게 수집하여 단어장을 만들고, 만들고, 만들면서
사랑도 우정도 잘 모르고 서툴던 주인공은 그것들을 배우고
만들어갑니다.
'언어'의 신전에 바치는 경배 같은 영화라고 느꼈어요.
'오른쪽'을 어떻게 정의할지를 10년간 고민하다가 결국
반칙같기도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어떤 강박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직관적인 정의를 하는 장면이 감탄스럽더군요.
 
이 비극의 와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들을 
너무나 쉽게 내뱉는 이들의 무신경함을 보며 
이 주인공의 신중하다 못해 답답하고 조심스러운 여정이 떠오르더군요.  
 
결국 사회적 동물인 인간들이 서로 연결할 수 있는 통로는 언어겠지요.
'희망의 언어'가 이 잿더미 위에 다시 사람들을 이어주는
그 때가 언젠가는 왔으면 해요.
그러려면 먼저 오랫동안 이 사회 공동체의 언어가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허황되게 포장되고 남용되고 거짓되었는지 
분명히 밝히고 바로잡아야겠지요. 
'시스템'이라고 부르던 것들의 실상, 날것들을 보았듯이 말이죠.
그건 실상 다른 이름으로 불렀어야 하는 것이었는지 몰라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잘 모르던 '사랑', '우정', '동료' 이런 말들의 의미를 고민하며
그에 걸맞는 관계를 스스로도 만들어 가듯이
우리 모두 10년이 아니라 100년이라도 우공이산의 마음으로 노력해가야 할 것 같아요.
 
 
    • 이미 10여년이 되는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젊은 세대들이 과거와 비교할 때 유난히 심한 방식으로 기성 언어를 거부하더군요.


      맞춤법이든 어휘이든 조어법이든 표현법이든 규범적 언어, 표준어로부터 일탈해야 한다는 강박이 보였어요.


      그런 언어는 촌스러운 것이라는 듯 어떻게든 국어를 파괴하는 게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일반화되었죠.


      젊은 세대는 언제나 자기들만의 어휘를 만들게 마련이지만 이건 특정 세대의 색깔을 표시하는 도구로 머물지 않았죠. 


      어휘뿐 아니라 언어학적으로 볼 때 언어의 거의 전분야에서 전복, 조롱, 반항, 거부가 일어났으니까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게 80년대 운동권-대학가의 혁명주의 언어와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들도 국어파괴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언제나 '거부'는 '대안'의 제시로 이어졌죠. 지나칠만치 강박적으로요. (한국어 조어법을 무시한 괴상망측한 순우리말 어휘들의 범람을 떠올리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세대의 국어파괴는 그때와 분위기가 너무 달라요. 


      한 나라의 국어라는 것이 소속사회의 규범, 법, 기성질서를 대표하는 가장 고도화된 상징체계임을 감안할 때 


      이런 총체적 부정은 사회적 코드에 대한, 진지함과 권위 일반에 대한 전반적 불신의 증후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그것도 아니면 기성질서에 편입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의 증후이거나.




      아마 늙은 꼰대의 시각에 불과하겠죠. 하지만 제 눈에는 너무나 대비되어 보입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언어부터 바꾸려던 용감무식한 과거 세대와


      세상을 못 바꿀테니 언어나 비틀면서 노는 젊은 세대.




      아마 우리 세대가 고리를 끊지 못한 제도적, 문화적 폭력성의 산물이겠죠. 


      정신적으로 매맞고 자란 아이들...



      터무니없이 부담스러운 무겁고 거창한 언어에 취한 세대와 


      코드의 붕괴를, 의미작용의 오작동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그 언어의 파편들 속에서 사는 세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저는... 우리는...



      • 저는 댓글쓴 분보다는 요즘 애들에 가까운 나이라 그런지 몰라도 조금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 애들의 언어에 대한 반응은 희화화에 가깝고 현상적으로 그것은 다분히 인터넷의 영향입니다. 예전에는 입말과 글말이 분명히 구분되던 시절이었고 그런 상황에서의 언어에 대한 접근과 입말이 그대로 문자화 되고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는 상황의 접근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봐요. 그리고 언어 파괴의 측면도 있지만 언어의 재창조라는 측면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보고 있다보면 얼마나 기발한지. 게다가 이런 현상이 국내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고요.
        • 해삼너구리/'행복한 사전' 영화 주인공과 동료들이 패스트푸드점에 매복(?)하여 여고생들의 신조어들을 수집하여 살아있는 동시대의 사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 autechre/말을 맺지 못하시는 심정 알 것 같습니다..



         

    • 그런 놀이의 창조성을 부인하는 게 아닙니다. 규범, 모범의 이름으로 단죄하는건 더더욱 아니고요. 반듯한(?) 글을 잘 쓰다가도 어떻게든 중간에 유행어, 신조어, 언어파괴 등을 넣지않으면 안될것같은, 진지한것 공식적인 것은 민망하게 느끼는 분위기를 얘기하는 거죠.
    •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5~6년 전에는 더 심했죠. 그러다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왔고요. 요새 다시 약간 심해지는 경향이 있긴 한데, 심각한 수준까지 이르면 항상 자정작용을 동반하더군요. 

    • 영화 찾아서 보고 싶네요.

    •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무력감과 분노 때문에 점점 반 벙어리가 되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지요. 본래의 의미에서 어그러진 것들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모두가 자기가 뱉은 말에 책임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언급하신 영화 참 끌립니다.
    • 한국 대학의 일본 유학생이, 왜 한국 대학생들은 사전을 가지고 다니지 않냐는 질문을 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전자사전은 많이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전은 종이 중사전이었어요. 한국 출판사에서는 사전을 만들면 회사가 뼛꼴 빠진 후에 망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답니다. 왜냐하면 안팔리니까요. 과거 유명한 동아 출판사에서 사전을 만들고 폭삭 망해 두산이 인수했다는 이야기도 듣고 그랬죠. 사전이 언어학의 꽃이라고 그러는데, 장기적으로 한국에서 다양한 종류의 사전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조금은 걱정스럽죠. 포털에서 제공하는 사전은 그리 좋아하질 않는데 변화해온 과정을 소급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 역시 지나간 글 댓글도 다시봐얄 듯. 고맙습니다. 저도 영화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팬터지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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