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동 앞길에 다녀와서





사실 새벽에 속보 봤을 때는 아침이면 어떻게든 상황이 끝나겠지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사를 확인하고, 그분들이 아직 거기 그대로 계시다는 걸 확인하고도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였습니다.

아침에 집에 뭐 수리하는 것 때문에 사람 오기로 해서 집을 비울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기도 했고요.

오기로 했던 사람이 일 마치고 돌아갔는데도 아직 거기 그대로 계시다는군요.

그래서 가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미안하거나 죄스럽거나 해서 못견뎌 움직인 게 아니라, 유가족들을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이 일이 저질러진 이후로 분향소도 가보고 <가만히 있으라> 행렬도 쫓아가 보고 했습니다만, 그래도.

정성들여 골라낸 사진이나 애써 짜낸 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갔습니다.


살면서 이런저런 집회, 투쟁현장, 눈물바다, 남부럽지 않게 봤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런데 오늘 본 유가족의 얼굴들을, 감정들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분들의 얼굴을 오래 쳐다볼 수가 없었거든요.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분들 눈을 마주치면 내 알량함과 무력함을 이 햇볕 쨍쨍한 백주대낮에 다 고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냥 그분들이 품고 있는 영정 속의 얼굴들만 바라봤습니다.


오늘 무슨 시험이라도 보는 날이라 학교가 일찍 파했는지, 학생들이 참 많이 지나다니더라고요.

점심때부터 오후 내내, 경찰과 유가족 사이로 터놓은 좁은 길로 삼삼오오로 끊이지 않고요.

그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려나, 그 아이들을 보는 저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려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깃발을 든 중국인 관광객 무리가 경찰벽을 뚫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사진을 참 열심히 찍고 다시 경찰벽을 뚫고 유유히 갈 길을 가더군요. 낯설게도.


두 시쯤 지나니 땡볕이 쎘습니다.

장례도 삼일, 사일, 오일 치르면 탈진을 하는데 이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생활이 이십일을 넘었으니.

청와대도 참, 어차피 선택지도 없는데 이분들 조금이라도 덜 고생시켰으면 하고 바랐지만,

한나절 다 보내고 나서야 KBS 사장님을 보내더라고요.


간밤에 뒤적거리던 책에 마침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거나 기억할 수 없는 외상은 더욱 강하게 우리를 괴롭힌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으로 어떤 사건을 잊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내어 그것을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는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유념해야 할 것은 존재existence의 반대가 비존재nonexistence가 아니라 존속insistence이라는 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계속해서 존속하며 존재하기 위해 노력한다. ...... ...... 내가 결정적인 윤리적 기회를 놓쳐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면, 내가 '했어야만 했던 것'의 비존재 그 자체가 나를 영원히 괴롭힐 것이다. '내가 하지 않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해도, 그 유령은 계속해서 존속한다."


뭔가 잘 정리해서 글을 쓸 생각이었지만, 그냥 멀뚱멀뚱 서서, 그저 서있기만 하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겠네요.

그래서 그냥 읽던 책에서 몇 줄 옮겨 적고 마칩니다.





    • 잘 다녀오셨네요. 전 겁장이라 마음 다치는게 싫어서 언젠가부터 동영상도 못보고 소식만 듣고 있답니다.

      무슨 책의 내용인지 궁금해요.
      •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입니다.

        • 감사. 지젝은 번역보고 짜증이 나서 게으름반 짜증반 포기했는데 인용하신 거 보니 다시 혹 동요되는군요.
          • 저도 지젝은 잠 안올 때 수면제로 읽습니다. ... 하지만 이 책은 챕터 하나가 짧고 챕터가 평면적으로 구성되서 읽기에 좀 낫습니다.
    • 퇴근하고 뭐라도 사서 가보려고 했는데 유족분들이 다들 돌아가셨다 해서 한발 늦었다 했지만 그나마 억지사과라도 받고 가셨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요 그래도 큰고양이님도 수고하셨고 고맙습니다
      • 햇볕에 탈진하는 분들이 생겨서, 억지사과든 뭐든 이분들 빨리 쉬게 할 수만 있으면 다 좋다 싶었어요.

    •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서 노란 종이배를 접기도 하는데, 저는 종이배 접는 법도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서있기만 했습니다.




      yMlRLCZ.jpg 

    • 유가족분들께 큰 힘이되어주셨네요..전 가다가 가족분들이 내려가셨다고해서 되돌아왔습니다만 ㅡㅡ......


      가족분들 오늘만이라도 좀 푹 쉬셔으면 좋겠어요..

      • 네. 다만 하루라도 좀 쉬셨으면. 그런데 아마 못 그러실 것 같아요. 오늘 그분들 뵈니..

    • 저도 다녀왔습니다. 속상했어요.

      무지 더웠는데 유족분들 건강 상하실까 염려 됐어요.

      입금이 됐는지..;; 유족들 선동(폭력시위로 전환시켜 강제 해산 등)하려고 경찰지지선 밖에 소리지르며 발광하는 무리들 때문에 머리에 히터가 들어오더군요.

      그러나 YTN 촬영팀이 "여기가 어디라고 너희가 있냐. 너희 언론이 학생들을 죽인거다. 언론도 이렇게 강하게 대응해야 제대로 한다. 이명박 때 강하게 못해서 지금 이렇게 된거다." 라고 말씀하시는 현장분들께 쫓겨나는 걸 보며서? 좀 시원했네요.
      • 그쪽 양반들이 공통적으로 목청이 좋더라구요. 오늘 온 양반들은 삭발까지 하고 플래카드는 무슨 "국민이란 가죽을 벗어라" 어쩌고.

      • 에고고 클로이님도 애쓰셨네요. 그냥 감사합니다.

      • 유가족분들께 어떻게 저래요.그쪽 인간들은 인간성이라는게 존재하지 않나봐요.

    • 글만 읽어도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그분들 그저 먼저보낸 아이들,가족들 생각으로 마음껏 슬퍼하기만도 모자란 시간인데...
    • 수고하셨네요...저도 요즘은 유족분들 생각만 하면 마음이 미어진답니다. 멀쩡히 일 하다가도 울컥 울컥 한데 그 분들은 어떠실지...;;

    •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쩌면 마주쳤을지도^^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7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1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9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8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7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3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