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요?
예. 뜬금없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사실 듀게의 전반적 영화취향(그런 게 있었다면)과 어긋나는 면이 많았는데 그중 유독 딱 맞는게 이 영화였죠.
극장에서 여러번 봤고 프랑스판 dvd (한때는 최고라고 극찬받던), 이후에 나온 UE도 샀고,
98년에는 '효신 ♡ 시은 10주년' 기념글도 올리고 했거든요.
근데 그게 벌써 6년 전인가요?
(참고로 오늘은 효신이가 시은이와 사귄지 5760일 되는 날입니다.)
듀게의 한 분께서 3000일 기념 게시물을 올리셨을 때만 해도 호응이 뜨거웠고,
기억해뒀다가 제가 10주년 게시물을 올릴 때만 해도 반가워하는 분들이 계셨는데,
요즘은 듀나님도 그 누구도 이 영화 얘기를 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게시판의 역사도 15년쯤 되었으니 인적구성이 물갈이가 되어도 여러 번 되었을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죠.
남들 핑계 대는 척 외로운 척 글을 시작했지만 사실은... 제 얘기죠 뭐.
얼마전 책장 구석에 꽂혀있는 UE dvd를 보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젠 저 영화를 봐도 감흥이 별로 없겠지...
어쩌다가 이 영화에 그렇게 끌리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유학시절 프랑스에 이 영화가 개봉했는데 지인이 이 영화에 스탭으로 참여했다고 해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러갔다가 감탄하고
나중에 다시 보면서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임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바보선언',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과 함께 최고의 한국영화라고 생각했죠)
그 뒤로 자꾸 다시 보면서 점점 빠져들었던 것은 알겠는데
여고생이나 소녀 정서에는 관심도 없고 경멸만 품은 사람이 언제부터 그렇게 엉엉 울면서 이 영화를 보게 된 걸까요?
모르겠어요. 왜 저를 그렇게 자극한 건지.
좀 다른 얘기지만, 그러니까 그보다 이후의 일이지만요.
왜, 미드 같은 것을 오랫동안 보다 보면, 그러니까 나중에 몰아보는 게 아니라 6-7년 동안 실시간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 세계의 실재성을 꿈꾸게 되잖아요. 언급되지 않은 보여지지 않은 뒷이야기들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하고, 단서 없는 것도 궁금해하고.
(ER에서 로스는 캐롤과 잘 살고 있을까?)
어찌 보면 현실세계의 꽤 친구를 직접 만난 시간보다도 미드의 주인공을 만난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때쯤 되면 그 세상은 제 삶의 세계, 실제론 지극히 협소한 제 현실에 대해 그보다 훨씬 생생하고, 더 인간적이고, 더 많은 감정이 담긴 추가 영토, 외장하드가 되는 거죠.
예. 전형적인 돈키호테-보바리 부인 증후군이죠.^^
여고괴담두번째 이야기 UE의 방대한 '잘린 장면'들을 보는 건 그런 경험이었습니다.
길지 않은 러닝타임의 장편영화 한 편인데도 이미 너무 여러 차례 봤고
평소의 영화관람 습관과는 달리 지나칠 정도로 그 세계에 몰입이 되어 있다 보니
그 '잘린 장면들'이 없어짐으로써 전체 내용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 중 한두 개만 넣는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가 등을 그 무한한 조합을 한없이 상상하곤 했죠.
무엇보다 잘린 1분짜리 장면 하나가 본편에 정식으로 더해진다면
내가 고작 90여분밖에 알지 못하는, 즉 세상에 90여분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 애들의 삶이 그만큼 더 늘어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머리로는 현재의 (많이 편집된) 날렵한, 즉, 불완전하기에 더 아름다운 '프로듀서 컷'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미학성을 희생해도 좋으니 그 군더더기들을 집어넣어 더 많은 사연을 포괄하고 싶었죠.
그 유치하고 조잡하고 편집되어 마땅한 무수한 장면들을 다 넣고 싶었어요.
(제가 영화편집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았다면 저 혼자만의 세 시간짜리 감독판을 만들었을 겁니다.)
근데 이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던 제가 이젠 없네요.
프루스트가 옳아요. 사람은 수십 개의 자아로 구성되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그 중 몇 개가 죽고, 돌아보면 그 자아가 이제는 낯선 것이 되지요.
지금 dvd를 재생하면 아마 끝까지 보지도 못할 것 같아요.
버겁거나 그런게 아니라 이입이 되지 않아서요.
그래서, 저야 이미 버린 몸이니 :-) 다른 분들이라도 무사하신가 궁금하기도 하고 무사하셨으면 좋겠어요.
아직들 계십니까?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와 연애하던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