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인? '변증법', '변증법적 사고' 라는 개념/단어를 설명해 주실 분 있으신가요?
제가 헤겔을 제대로 읽어 본 적도 없고 철학 전반에 대해 관심은 있을지언정 짜임새 있게 공부하지도 못했기 때문일지 몰라도
아직까지 글을 읽을 때 '변증법'이라는 단어를 대하면 머리 속에는 물음표가 떠오릅니다.
정반합, 변증법적 유물론, 계단 형으로 이루어지는 발전 형태, 역사의 선형적 진보, 여러가지 말들이 이리저리 맴돌긴 하는데
그래도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정확하게, 학문적으로, 정도가 아니라 감도 잘 못잡겠어요.
예를 들면 제가 지금 읽고 있는 문장은 이런 겁니다.
"리히터의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회화와 사진의 관계는 최종적인 종합(synthesis)없이 끊임없는 변이를 드러내는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까 회화랑 사진이 서로 정반을 이루면서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도록 끊임없이 긴장하는 형국? 인건가요?
뭐 굳이 이 문장이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서 읽을 때마다 '흐응..' 이러면서 이해했다 치고 어물쩡 넘어가기로 몇 년을 버텨온 것 같아요.
저를 이런 무지의 상태에서 구원해 주실 분.. 없으신가요?
그렇군요. 대충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긴 했는데 항상 확신이 없어서 혼란스러운 기분에 머물곤 했던것 같아요. 댓글 감사합니다.
누군가 a라는 의견을 냈는데 그걸 b가 반박합니다. 이 두 가지 견해를 종합해서 c라는 의견이 나와 이것이 正한 논리가 됐습니다.
근데 이 正의 의견을 반박하는 反의 의견이 나옵니다. 그것을 종합하니 合이라는 논리가 나옵니다. 이것은 正한 논리가 되는 거죠. 근데 또 이걸 반박하는 反의 의견이 나옵니다. 그것을 종합하니 合이라는 논리가 나옵니다. 이것은 새로운 正한 논리가 되는 거죠. 근데 또 이걸 반박하는 反의 의견이 나옵니다. 그것을 종합하니 合이라는 논리가 나옵니다. 이것은 또 새로운 正한 논리가 되는거죠. 근데 또 이걸 반박하는..
아하 뭔가 계속 움직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력이 되는 이미지? 가 떠오르는 군요.
댓글들을 가만히 보다보니 제가 어떤 점을 이해 못했는지, 또 왜 혼란스럽다고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아요. '합'이 머물지 않고 또 정반합으로 이어지는 그 움직임 자체가 제가 놓치고 있었던 무언가였군요.
저는 정반합을 현실에서 이전 단계의 모습을 부정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 변화가 가능성으로 숨어 있다가 조건이 갖춰지면 실현되고, 이전 단계에 대해 완전히 반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까지 포함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변증법은 현실의 변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서술하는지에 대한 방법이구요. 다른 분들이 설명해주신 거랑 거의 비슷한데 정이 있으면 그를 부정하는 반(안티정)이 있고 그 둘의 장점을 잘 모아서 합! 이 아니라 정과 정의 부정이 함께 합이라는(합이라고 해서 다 옳은 방향은 아니고 그냥 다음 단계일 뿐) 단계로 나아간다는 게 (헤겔의) 변증법에서 중요한 것 같아서 써 보았습니다...횡설수설하네요. ^^;
(용어 선택을 철학적으로 엄밀하게 해야겠지만) 이론이 먼저가 아니라 현실이 있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을 만드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까 인류가 진보를 이루어내는 과정이 변증법이라는 것으로 설명이 되는 것이지 변증법이라는 것에 맞추어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가령 토론이 이루어지는 데 그게 정-반-합을 거쳐 일정한 결론을 향해 나아간다면 좋겠지만 그냥 서로 처음 주장을 굽히지 않고 별다른 발전 없이 머문다면 이도 저도 아니겠지요.
본문과 댓글 덕에 저도 배워갑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이 명언明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은 중세의 미망에서 근대의 자아를 비추는 빛으로 기능했지만, 자기 존립의 근거를 자기 안에서만 찾겠다는 어떤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죠. 근대 철학 내부에서 그것에 대한 반성은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고 보는데, 라이프니츠의 경우 단자 - 예정설에서,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비관 - 부정의 채널에서 그러했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의 변증법 개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아요. 내가 외부에 의해서 변할 수 (또는 나아질 수) 있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더 현대적인) 취향론 혹은 개성론과 차별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가다머가 비판한) 칸트의 미적 범주에 대한 비판으로서도 의미 있다고 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