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레인저, 필로미나의 기적, 한공주 봤습니다(필로미나, 한공주 스포 있어요)

토요일에는 김혜리의 영화산책으로 론 레인저를, 오늘은 혼자서 필로미나의 기적과 한공주를 봤습니다.


론 레인저는 생각보다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 영화더군요. 

그냥 서부에서 괴짜 인디언과 좀 덜 떨어진 백인 하나가 총 들고 설치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인디언과의 전투(라고 쓰고 학살이라 읽어야겠죠)나 소위 개척 시대라는 게 얼마나 야만적으로 진행되었는가 등등

어둡고 묵직한 주제들이 줄거리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물론 늑대와 춤을 같은 영화는 아니고, 진지한 얘기를 한다고 봐도 상영시간이 지나치게 길긴 했어요.

게다가 톤토 캐릭터가 잭 스패로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역시 감상에 크게 방해가 되는 요인이고요.

피 묻은 서부 역사를 꽤 비중 있게 다루고 있으면서 너무 희화화된 인물들을 내세우는 점도 썩 편하진 않았습니다.

지루함에 몸을 배배 꼴 정도는 아니었지만 망한 게 이상하지도 않았달까요.


김혜리 기자님의 해설은 고어 버빈스키가 그리는 균질한 집단과 비균질한 집단의 대결,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화 등등 현대 사회의 주류 질서에 대적하는 카오스와 무정부주의에 중점을 두고 진행되었습니다.

당연히 감독의 대표작인 캐리비안의 해적 얘기도 많이 나왔는데 기자님이 말씀하신 부분을 염두에 두고

1편은 한번 더 볼까 싶어요. 이 감독 작품 중 유일하게 집에 디비디도 있고 하니.




필로미나의 기적은 분통 터지는 사건을 파고드는 영화 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밝은 분위기였습니다.

전 딱 마틴 식스미스 같은 성향의 사람이고(물론 일류 대학 나온 상류층은 아니지만요), 

굳이 종교의 치부를 드러내는 영화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종교(특히 일신교)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진 터라 그냥 넘길까도 했는데 

주디 덴치의 연기가 보고 싶어서 영화관으로 갔어요.

그리고 기대대로 주디 덴치가 그리는 필로미나는 아주 매력적인 할머니였습니다.

사실 실생활에서 직접 만난다면 사람은 좋은데 좀 주책이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스크린에서 보는 건 굉장히 유쾌하더군요.


필로미나와 마틴이 무슨 만담 콤비처럼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들도 재밌었고, 

특히 필로미나가 성적인 부분에서 돌직구를 날리는 몇몇 장면은  빵 터졌어요.

반면에 자막이 너무 순화돼서 불만이었습니다. 클리토리스라고 적으면 관람등급이 올라가기라도 하는 걸까요?


여기서부턴 필로미나 스포일러 포함입니다.




호텔 식당에서 혼자 좀 놔두라는 마틴의 말에 샐쭉해져서 자리를 떠나 요리사랑 얘기하다가 금방 돌아와서

라즈베리 갖고 왔다고 또 살갑게 구는 장면에선 앤소니의 죽음이 밝혀지는 안타까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왔어요. 할머니 너무 귀여우셔서.


앤소니는 필로미나의 걱정처럼 약쟁이나 노숙자나 비만이 된 건 아니었지만 동성애자 공화당원으로서 나름 고생을 하며 살았겠지요.

웨스트윙에서 조쉬가 동성애자가 공화당원을 상대하며 어떻게 공화당원일 수가 있냐고 소리치는 장면이 생각났어요. 사실 저도 조쉬와 같은 입장입니다. 

머리로는 그 사람을 이루는 부분에서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그리 크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신념과 판단, 가치관으로 인해 공화당원이길 선택했으리라 이해할 수 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선 아니 도대체 왜!!! 라고 소리치고 싶은 욕구가 남아있어요. 레이건 정부의 HIV 연구 중단 얘기가 나올 땐 특히 더 그랬고요.


망할 수녀들의 농간으로 친모를 만나지 못하고 눈감은 마이클의 마지막에선 육성으로 욕이 터져나왔습니다.

수녀님을 용서한다는 필로미나의 태도가 훨씬 성숙하다는 건 알지만 그게 어디 쉽나요.

어톤먼트의 브라이오니에 버금 가는 살해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인데 이건 뭐 신을 등에 업었답시고 속죄할 줄도 모르고 그야말로 역겨웠습니다.




한공주는 세편 중 제일 괴로운 영화였습니다.

힐러리 스웽크의 소년은 울지 않는다와 마찬가지로 보길 잘했지만 두번 다시 보고 싶진 않은 작품이었어요.

(내용과는 아무 상관 없지만 세월호 사건이 겹쳐져서) 어른들이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아이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해지는가 

이런 생각이 마구마구 들며 영화가 끝나고 바로 일어나질 못했어요.

진짜 우리나라가 얼마나 후진국인지, 약자에 대해 얼마나 폭력적이고 잔인한 사회인지 새삼 절절하게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한공주 스포일러 있습니다.




배우 천우희의 창백하고 선이 가는 얼굴과 언뜻 무표정하게 느껴지는 연기가 결합되어 

한공주 캐릭터가 정말 생생하게 느껴졌고 그만큼 상황 역시 끔찍하고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영화에도 나온 친구의 대사처럼 "거긴 길 없어" 그 자체였습니다. 도대체 문자 그대로 기댈 곳 없는 저 상황에서 공주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간신히 터를 잡고 일상을 가꿔나가는 공간에, 그것도 공공기관에까지 가해자 부모들이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고 

아이를 쥐잡듯 궁지에 몰아넣는 장면은 진짜 인간혐오를 부추기기까지 했어요.

노아를 보면 노아가 부인에게 인간은 모두 사악하다고, 당신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지- 이러는 장면이 있는데 그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부모란 자기 자식 소중한 만큼 남의 자식도 소중하단 걸 아는 존재이기도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제 새끼 위해 남의 새낄 짓밟을 수도 있는 존재이기도 하겠지요.


전 비관적인 인간이라 결말을 한공주의 죽음으로 봅니다만, 마음이 바뀌어 힘껏 발을 놀려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한들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 한공주 정말 괴로운 영화였어요. 


      마지막 장면에서는 세월호의 학생들이 생각나서 더 기분이 처참해졌어요.

      • 네 진짜 도가니 이후로 제일 괴로웠던 것 같아요. 보는 사람도 이리 끔찍한데 실제로 겪어낸 사람 심정은 어떨까요.
    • 저도 어제 한공주 보다 삼십분 남기고 나왔습니다. 원래 그놈목소리 도가니 이런류 영화를 안보는 편인데 너무 극찬이 자자해서 어머니 모시고 보러갔다가.. 지금은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들어요 왠만하면 아무리 별로인 영화라도 결말까지 보는편인데 도저히 힘들어서 끝까지 버티질 못하겠더라구요. 감정을 쥐어짜거나 격렬하게 자극점을 찌르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보는내내 신경줄을 소모하게 만들어서.. 버티다가 항복하고 나와버렸어요. 시국이 시국인것도 있고.. 제가 여자인데다, 주인공 또래 여동생도 있어서그런지 더 괴로웠어요.
      • 영화보다가 시각을 한번 확인했는데 아직 50분 가까이 남았길래 과거 회상도, 앞으로 갈 길도 아직 한참 남았구나 싶어서 가슴이 답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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