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했던 피크닉 결혼식

미국에 십년 넘게 살면서 꽤 많은 결혼식엘 갔었네요.

미국에서도 경제사정과 집안 분위기 따라서 식 자체(피로연 포함)만 해도 몇천 만원 넘게 깨지는 호화 호텔 결혼식도 있고 몇백 만원 안팎의 간소한 군인회관 결혼식도 있더군요.

커플이 라스베가스 같은 곳에 가서 뚝딱 둘이서 결혼하면서 결혼사진 몇 장만 단체 이메일로 보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카리브해의 휴양지에서 결혼식을 해서 하객으로서 참석할 시간이나 비행기값+숙박비를 감당할 능력이 되어야 참석할 수 결혼식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 초대장을 받더라도 갈 수 있는 하객의 수가 매우 적어져서 하객 일인당으로 계산되는 결혼비용을 오히려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관례라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식 자체가 매우 다양하더군요.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결혼식은 친한 지인의 피크닉 결혼식이었습니다.

신랑-신부는 채식주의자이고 수의사와 대학교수라는 수입이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지만 알뜰하고 즐거운 결혼식을 전혀 부모님의 개입없이 준비했더군요. 두 사람의 부모님은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어요.

초여름이었는데 결혼식은 30분 정도 시에서 떨어진 state park였습니다. 대부분의 공원에서 하루 5-10만원 정도면 렌트할 수 있는 피크닉 셀터(지붕이 있고 피크닉 테이블과 그릴이 딸린 대형 정자)를 두개 정도 빌렸더군요.

신랑은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에 하와이언 셔츠, 알로와 꽃화환을 목에 걸고 스포츠 샌들을 신고 있었고 신부는 면으로된 아이보리 계통의 여름 원피스에 플립플랍을 신고 꽃화환을 머리에 쓰고 있었어요.

변호사 자격증이 있는 지인이 주례를 하고 강이 바라보이는 나무 아래에서 혼인서약을 하고 실반지 같은 결혼 반지를 주고 받더군요.

사진사는 없었고 디지털 사진기가 대중화 되긴 전인 2000년대 초라서 대신 개당 7불 정도 하는 일회용 사진기를 10개 정도 준비해서 하객들에게 두루 돌리더군요. 하객들은 결혼식 내내 마음껏 사진을 찍고 일회용 사진기를 나중에 신랑신부에게 돌려줬습니다.

참, 하객의 드레스 코드도 피크닉 차림이었죠. 저도 반바지 차림이었습니다.

식이 끝난 후 신랑이랑 친구들이 거들어서 피크닉 테이블에 부페식으로 피로연 점심을 차렸습니다. 신랑-신부가 좋아하는 식당의 음식을 주문해서 당일 오전에 요리된 파스타, 샐러드, 샌드위치 등등이 부페용 대형 은박지 그릇에 담겨진 것을 신랑이 본인의 픽업트럭으로 실어 왔더군요. 후식은 신부가 직접 만든 브라우니랑 파이였어요. 하객이 30-40명 정도였는데 모두들 양껏 먹고 배구, 배드민턴 등등의 피크닉 스포츠를 어두워질 때까지 하면서 신나게 놀았답니다.

하객들과 신랑-신부가 쓰레기 봉투를 들고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면서 결혼식은 마무리 되었고 신랑-신부는 결혼식 전부터 살던 자기들의 월세집에서 첫날밤(?)을 보낸 후 며칠 후 몬트리올로 자가 운전으로 신혼 여행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결혼 선물로 저는 한국산 찻잔을 셋트를 준비했습니다.

신부가 나중에 저한테 일러주기를 고지식한 신부 부친은 딸의 피크닉 결혼을 내심 못마땅해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주장 강하고 독립적인 딸부부에 약간 군시렁거리는 게 전부였다고 합니다. 피크닉 결혼식 부부는 아들 하나 낳고 여전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두고두고 생각나는 아름답고 유쾌한 결혼식이었어요.
    • 와 너무 좋네요. 특히 일회용 카메라 아이디어!

    • 그렇죠 결국 금전적인 부분이지요


      결혼식을 독립적으로 할수 있는 '돈' 만 있다면 다양한 결혼식 문화를 만들수 있겠지요


       부러운 결혼식 한장면이네요 한국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 대충 계산기 두드려도 백만원도 채 안 되는 결혼식이었죠. 일주일 다녀왔다는 신혼 여행은 기름값 등등을 포함해서 숙박시설의 급에 따라 적게는 50만원 많게는 100만원 정도였을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신랑-신부가 부모들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자립할 수 있는 능력과 사회적인 분위기겠죠.


        이 부부는 일년 쯤 후에 조촐한 집 장만을 하긴 하던데 여전히 싱글 시절부터 쓰던 이케아 소파랑 조립식 가구를 쓰고 조모에게 물려받은 식탁세트를 자랑하더군요.
    • 멋있고 바람직하다고 적극 생각합니다.


      북적되고 광고하고 돈 더드는 결혼식도 당사자들의 취향이겠지만요.


      햐 그런 묘수도 있군요 아주 멀리 못올데로 정해서 못오게 하는 방법이요.


      야회에서 일회용 사진기 선물하는 것도 아주 좋네요.

    • 사람들이 결혼 과정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 것은 그것이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 보다 충분히 낭만적이지 못해서 일까, 또는 원하는 것보다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또는 돈)이 소모되기 때문인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본문과 같은 결혼식을 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틀에 박히고 허례허식 투성이인 결혼식을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노력과 부담을 감당해야 할지도 못한다는 생각도 들구요. 이런저런 생각이 드네요.

      • 이 댓글 눈에 들어오네요
      • 미국에서 아이의 생일파티도 공원에서 저렇게 하는 것을 더러 봤어요.


        물론 공원 쉘터 예약하고 음식 주문하고 일회용 카메라나 배구공, 배드민턴채, 프리스비 등등을 준비하는 게 복잡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모든 게 격식을 따지지 않으니 준비 리스트만 잘 짜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금방 해결이 되더군요. 마실 물이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는데 하객으로 온 친구들 두명이 자원해서 근처 마트로 생수를 사로 갔는데 30분 안에 사오면서 도로변에서 어떤 농부가 싼값에 팔던 수박 서너개를 덤으로 사왔더군요. 뛰어놀면서 목이 말랐던 터라 다들 한조각씩 맛있게 폭풍 흡입 했던 기억도 생생하네요.
        • 결혼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그 전후에 수반되는 절차가 달라붙는게 많다는게 한국의 결혼문화 차이점입니다.


          당장 저 커플만 해도 이미 동거중이었으나 한국의 경우는 보통 집도 알아봐야 하고,집에 들어가야 할 살림도 알아봐야 하고..대부분의 결혼준비는 주말에만 가능하고


          -평일은 야근이 많으므로-기타 등등.


           


          사람들이 공장식 결혼식을 싫다 하면서도 막상 그걸 고르는 이유는 사실 그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게 수요가 많으니까 대세로 자리잡은것이지요.

          • 결혼식 문화는 단순히 식만의 문제만 아니라 그 사회의 여러가지 사회, 문화, 경제적인 측면과 얽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커플의 동거 문화가 아직 껄끄럽고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고 부모님의 의사도 존중되어야 하고 혼인 후 집들이로 깔끔하고 이쁜 신혼집과 세간살이를 선보여야 사람 대접 받는 사회적 압력 속에서 저런 분방한 피크닉 결혼식은 보통의 의지로는 힘들겠죠.
    • 이런 결혼식 하려면 돈을 포기해야 돼요. 하객이 3-40명이라면 유쾌하고 재미난 결혼식 얼마든지 할 수 있죠 왜 못하겠어요..


      청첩장 수 십개 찍고 유쾌한 결혼식 할래 아니면 수 백개 찍고 공장결혼식 할래 물으면 당연히 공장결혼식 합니다.

      • 그렇죠? 그동안 부모님이나 본인들이 투자해야만 했던 혹은 앞으로 내야만 하는 축의금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인정합니다. 상부상조의 전통이 일종의 부담스런 사회적 채무관계 비슷하게 되어버린 경우네요.


        또한 결혼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는 일종의 상속(증여?)도 포기해야겠죠.
    • 한번 더 한다면 참고하겠습니다. 십주년 기념으로 리마인드 웨딩을 하고 싶어요. 이제 삼년...남았군요.
    • 우왕 딱 제가 꿈꾸는 스타일의 결혼식ㅎㅎ 그러나 현실은... 결혼이나 할 수 있을런지 헣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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