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의 거리

제가 다니는 체육관에 다리가 좀 불편한 분이 매일 운동하러 오시거든요. 제일 느린 속도로 기계를 맞춰 놓고 걷거나 다른 근력 운동을 조금씩 하시는데, 다이어트나 근육 만들기 같은 게 아니라 재활치료의 느낌이 많이 듭니다.

저는 뭐 그러려니 하며 지나쳤는데, 이 분이 궁금했던 다른 회원들이 많았나 봐요. 어제 한 회원이 이 분이 잠깐 쉬는 틈을 타서 대뜸 "다리는 왜 그래요?" 물으시더군요. 바로 그 옆에서 운동을 하다 이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 '어쩜 저렇게 무례한 질문을! 저분 어쩌나...' 이러고 있었는데, 정작 질문받은 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릴 때 열병을 앓고 나서 그렇게 됐다며 대답하시곤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시더라고요. 곧 근처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분들이 속속 참여해서 너덧 분이 주변의 비슷한 증상과 치료경험 등등을 이야기하며 한 10분 넘게 수다의 장이 펼쳐졌죠. 그러곤 각자 운동하러 흩어졌는데 이제 이분들은 운동 다니면서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셨을 겁니다.


그러곤 듀게에 들어왔더니 스포일러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란이 일었네요. 내 인생에서 한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또 그 영화에서 스포일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또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아주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는 걸로(절대적으로 사소하다는 게 아니라 저 같은 사람한텐 그럴 수도 있단 거니 오해 마시길) 글이 여러 개 올라오고 댓글로 이야기가 오가고 하는 걸 보다 보니 어제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과 겹치며 요즘의 한국 사회와 제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비교해보게 되더군요.


여긴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약간 큰 땅덩어리에 인구는 7백만 남짓. 제일 큰 도시도 백만을 못 넘기죠. 도시지역을 조금만 벗어나면 몇십 분을 가도 인가 한 채 안 보이는 산악지역이 펼쳐집니다. 사람을 보면 우선 반갑지요. 잔소리마저 그립다고나 할까요. 반면 한국은 어딜 가나 사람, 사람, 사람... 만원버스에 치이고 길에서 인파에 밀려 다니다 보면 가끔 숨쉬기조차 벅찰 때가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물리적 공간(반경 100m쯤의 커다란 거품 가운데 사람이 들어있는 모양을 상상하심 됩니다^^)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에선 이게 참 어려운 일 같아요. 이 공간이 매번 침범당하다 보면 아무래도 예민해지겠죠. 비눗방울처럼 혼자 떨어져 둥둥 떠다니는 게 기본이라면 가끔 두 개씩 세 개씩 덩어리져 붙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스티로폼처럼 옴쭉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리면 누구라도 갑갑하지 않겠습니까.

인구밀도와 거주민들의 행복도 간에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한 요소쯤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오랫동안 너무 짓눌려 상처받기 쉽게 돼 버린 얇은 거품으로 몸을 감싸고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예의들이 계속해서 더 섬세하게 다듬어지고, 또 그게 다시 스트레스가 되어 거품을 짓누르고 있는 건 아닐까요.

    • 저는 도시치고는 인구밀도가 낮은(수치근거는 모르겠고 제 느낌) 동네에 살고있는데 그래서 참 좋아요. 조금만 마을버스 타고 나가면 지하철역 근처에 없는게 없고 내가 살고 자는 동네는 조용한편이니까..



      암튼(?) 우리나라는 오지랖의 동네니까요!

      • 여기도 오지랖 쩔기는 마찬가지예요 ㅎㅎ 시장통에서 길을 물으면 알건 모르건 무조건 가르쳐 주는데 그게 사람마다 다 딴 방향이라는.

    • 이민가고 싶어지는 글입니다만.. 가면 거기서도 다른 문제가 괴롭힌다는걸 아는 중년이 되어버린지라.. ㅎㅎ
      • 스스로가 어떤 문제를 얼마만큼 심각하게 여기느냐가 선택의 기준이겠죠.

    • 아는 사람 아이가 사시인데 부모도 당연히 신경쓰는 것을 애랑 10분만 손을 잡고 다녀도 다섯 명은 말을 건다고 합니다.애가 눈이 사시네.수술은 알아봤냐.애가 눈이 왜 이러냐...........어지간히 좀 해줬으면.

      • 여기나 한국이나 남의 일에 참견하고 오지랖 넓은 건 매한가진데, 받아들이는 감수성의 온도차이는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진리의 케바케는 여기에도 적용될테지만요.

    • 배려와 관심이란게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요. 저는 먼저 말하지 않으면 묻지 않는게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 전에 먼저 물어봐주는 것이 배려라고 하더군요.

      각자의 성향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서 사람을 상대하는데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인간은 알면 알 수록 어려워요.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기 어렵기도 하고, 소득에 비해 물가가 너무 높아 생활하기 힘들기도 하고, 경쟁이 지나치게 치열하기도 해서 전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높고 예민한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특히 듀게는 좋게 말하면 섬세하고 나쁘게 말하면 까탈스러운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인 것 같습니다.
      • 두 문단 다 크게 공감합니다. 인생이란 게 그런 거 같아요. 이게 정답일까 저게 정답일까 하며 시도해보고 수정해가는 '과정'요. 끝까지 답은 모르는 시험.

    • 본문에 너무 공감합니다. 한국 특히 서울의 인구밀도는 도무지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끔찍함이 있습니다. 물론 서울에 거주하느는 서울 시민인 저도 그 끔찍함에 일조하는 1인이겠지요.

      • 매일 그 지옥철로 출퇴근하면서 그래도 정신줄 놓지 않고 인간미 잃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 싶더군요. 공학에도 '피로파괴'란 용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닌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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