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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저에게 이 분의 메시지에 대한 느낌은 "잘 배우고 어려움 없이 살아온 강남의 중산층 집안 딸들에게도 아픔은 있다"라는 정도였습니다. 아마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의 이미지가 가장 선명했기 때문이겠죠. 단편 '삼풍백화점'을 읽은 것은 아마 그 후였을 텐데, 책으로 보았을 때는 단편집 중의 여러 단편들 중에 하나로 그냥 별 느낌없이 흘려 보았었는데, 나중에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에서 읽어주는 것을 듣고 오히려 와닿았던 케이스였습니다.
김영하 작가의 담담한 목소리로 듣는 20대 중반 고교 동창의 얘기들이 얼마나 새롭게 다가오던지. 서울의 강남이라는 공간 안에서의 계급 문제와 백화점의 붕괴라는 소재를 적절하게 잘 엮어냈다는 탁월함 외에도 작가의 자전소설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니 감동이 배가됐다고나 할까요. 지난해 이 팟캐스트를 처음 들었을 때 지하철 2호선 안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김영하 작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세상에 소설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소설을 써준 정이현 작가에게 감사한다"라고 말했는데요, 한 작가가 동시대 동료 작가에게 들을 수 있는 최상의 찬사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부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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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소설은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백화점 붕괴를 그 시절 강남 한복판에서 경험했던 저에게 여러 문제들을 새롭게 상기시키게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유년시절 대부분을 8학군에서 보낸 나는 왜 이런 정치적 성향을 갖게 되었는가. 따위의 문제들 말이죠. 더불어 왜 20년간 나와 모든 투표를 같은 인물에게 했던 전라도 출신 어머니가 박근혜 대통령은 미워하지 않는가. 어쩌다 충청도 노동계급 출신 아버지가 골수 극우파가 되었는가. 등등.
돌이켜보면 저의 정치적 성향을 좌우했던 것은 초등학교 2~3학년 2년간을 공단이 아직 있던 시절의 구로동에서 다녔을 때 경험했던 기억들과, 중학교 2학년 때 읽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만나서 이뤄낸 하모니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떤 계기가 되었을지언정 제 안에 원래 있었던 어떤 성향이 먼저 존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운동 경기를 보아도 특별히 응원하는 팀이 없으면 무조건 더 못하는 편을 응원했고, 장사 잘되는 문방구랑 좀 안되는 문방구가 붙어있으면 장사 안되는 문방구에 갔어요. 그래야만 뭔가 공평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마음이 있었나봐요. 자본주의와는 영원히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 ㅎ 여튼 그 마음의 근원을 밝혀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로동에 살 때 공단 근처에 살던 한 친구의 집에 놀러갔는데, 그 집 식구들은 정말로 간장 종지에 김치 하나를 두고 저녁 밥을 먹었습니다. 친구 집 바깥에 있던 화장실에 갔다가 빽빽한 유리문들 사이에서 친구네 집 문을 찾지 못해 헤매었던 기억도 납니다. 가끔 12색 크레용도 마련하지 못했던 구로동 친구들도 있었는데, 2년 후에 강남으로 돌아와보니 64색 크레용은 기본에, 어떤 아이들은 방학이면 미국에 다녀와서 반 전체에 미제 크레용을 방학 선물로 돌리곤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새 짝꿍의 저에 대한 첫 질문은 "너네 아빠 차 뭐야?"였습니다. 반 아이들은 누가 몇 평에 사는지, 누구네 아빠의 직위가 이사인지 부장인지까지 모두 아는 상태로 서로를 사귀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렴풋이 내 전 친구가 12색 크레용도 없고, 새 친구가 (사파이어 블루가 있는)64색 크레용을 갖고 있는 것은 이 아이들이 뭘 잘하고 잘못해서는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라면 응당 24색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릴 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여간 이런 생각들은 아주 오래 전에 하다 먹고 살기 바빠서 접어 두었던 것들인데 삼풍백화점을 다시 듣고 반복해서 몇 번 더 들으면서 다양한 생각들을 하게 됐어요. 소설을 귀로 듣는다는 것이 오히려 더 다양한 생각과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 같아요. 김영하의 자전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도 책으로 읽었을 때보다 오디오로 들으니 훨씬 더 좋았습니다. 물론 책 읽기 귀찮다는 핑계로 팟캐스트만 주구장창 듣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덤덤한듯 착착 감기는 김영하님 목소리도 한 몫 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