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XSW에 온 한국 밴드 후기

제가 사는 도시에서 매년 이맘 때 테크 산업, 영화, 음악을 주제로 10일 동안 컨퍼런스, 쇼케이스, 영화 상영회가 펼쳐지는

South by South West라는 페스티벌을 하는데, 작년부터 한국의 밤이 생겼어요.

일본의 밤은 벌써 오랜 동안 하고 있어서 저도 여러번 가봤는데 한국의 밤은 작년이 처음이었고

올해는 규모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아요.

K-POP 나잇은 8시에 시작했는데 화요일에도 불구하고 줄이 너무 길어서 첫번째 밴드는 놓치고,

넬, 크라잉 넛, 이디오테잎, 박재범, 현아 이렇게 쭉 봤어요.

예전에도 윤도현 밴드가 SXSW 때 온 적이 있는데 그 때와 다른 점은,

관객의 90%를 차지하던 한국인의 비율이 40% 정도로 줄고 나머지를 외국인들이 채웠다는 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박재범 보러온 팬들이겠거니 했는데

오히려 현아 남자팬들이 훨씬 많더군요.

박재범 공연 시작하기 전에 갑자기 뒤가 훤해지며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는데

레이디 가가가 잠깐 들렸더라구요. 

전혀 몰랐던 밴드인 넬을 발견했고, 크라잉 넛은 여전히 신나게 잘 놀아서 뭔가 안심이 되었고

박재범은 그냥 미국 음악, 현아는 역시 예쁘기는 하더라는 그냥 별 것 없는 후기.


다음 날은 윤도현 밴드 공연에 갔었는데 다른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는 단독 공연이었지만

여기서는 여러 밴드와 쭉 이어서 40분 씩 공연했어요.

미국과 영국에 진출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노래 가사도 다 영어로 번역하고,

밴드에도 한국인이 아닌 멤버들도 있더라구요.

원래도 윤도현 밴드 음악에는 크게 관심없었는데, 영미 진출을 위한 음악을 듣고 조금 더 실망했어요.

저 정도 음악을 하는 밴드는 여기에도 얼마든지 있는데 뭔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된 느낌.


3째 날은 서울 소닉으로

Love X Stereo, No Brain, Rock 'N Roll Radio, Glen Check, Big Phony, Smacksoft

이렇게 공연을 했는데 특이했던 점은 노 브레인만 빼고, 모든 밴드의 보컬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더라는 점.

90년대 중반부터 미친듯이 불었던 미국 유학의 열풍이 - 비난의 뜻은 없어요. 저도 그 중 한 사람이라 - 10 몇년이 지난 후 이렇게 나타나는구나하고 새삼 놀랍기도 하고...

그리고 음악이 그냥 들으면 한국 밴드인지 영미 밴드인지 전혀 모를 정도라는 것도 놀랍구요. 수준이나 분위기 모두에서요.

특히 Glen Check 많이 좋더군요.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 딱 저 나이 또래의 남자애들이 할만한 음악인데 그걸 또 되게 잘 하더라구요. 

아직 학생인 것 같은 여자친구와 역시 학생인 것 같던 로드 매니져도 같이 왔나보던데 너무 풋풋하고 귀여웠습니다.


3일 내내 한국 밴드들을 따라다니다가 느낀 것은 항상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나름 많이 벗어나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사실 그동안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우리 문화에 자부심이 없었고 오히려 무시하는 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거였어요.

특히 지난 몇년 간 SXSW에 온 일본 밴드-물론 일본 밴드들은 유명한 밴드는 거의 안오긴 하지만요-의 수준과 비교하면 너무 훌륭해서

괜히 뿌듯해졌는데, 아직 민족주의까지는 아니지만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일군 성과에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랑스러워하다니 왠지 부끄러워졌어요.

미국이나 중국같은 나라의 국민이었다면 나도 꽤나 꼴사나운 민족주의자가 되어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구요.

아, 또 자책의 길로 빠져들고야 말았어요.


어쨌든 3일 내내 즐거웠다는 얘기.



    • 윤밴에 실망하실 것까지야. 윤밴을 '지지하는' 평론가들도 음악성은 인정한 적이 없을 겁니다.^^ 그냥 그런 음악으로 독자적 팬층을 갖고 있고 그거면 된 거죠.

      • 원래도 좋아했던 건 아닌데, 너무 별로인 음악을 들고 나와놓고 본인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해서 제가 대신 실망했나봐요 ^^;;

    • 현아가 버블팝때부터 서양 남자팬들이 엄청 많아졌더군요.

      • 저는 첫곡이었던 버블팝만 듣고 바로 나왔는데, 듣자하니 자기 노래가 2곡이라던데 나머지 35분은 뭘로 채웠을지 조금 궁금하긴 했어요.





    • 근데 좀 궁금한 게, 미국 사람들은 자국 문화에 굉장히 자부심을 많이 갖고 있나요?
      유투브 봐도 미국 사람들이 댓글로 자국 뮤지션 최고라고 막 싸우더라고요.



      ariel pink's haunted graffiti랑 테임 임팔라 팬들이랑 댓글로 싸운다거나
      이런 일 많이 봤거든요.



      전 일렉트로니카랑 록 오래 들었는데, 미국 쪽은 피치포크나 롤링 스톤스 같은 평단 때문에



      자국 뮤지션 과대평가가 심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 저의 좁은 인간 관계 안에서는 미국 문화에 굉장히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데,


        그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특히 음악 쪽으로는요.

    • 오스틴에 계신 거군요?

      • 네~ 원래는 학교 졸업하고 도시(?)로 가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 동안에 여기도 나름 도시가 되었네요 ㅎ

    • 으헉 놓치셨다는 kpop 나잇 첫 밴드가 평론가들 사이에선 가장 평이 좋았던 할로우 잰 이었을텐데 놓치셨다니 안타깝네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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