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그리워함,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1년전 이맘때 즈음에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묘소에 간적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돌아가신 후 처음 가보는 성묘였죠.

간단히 자리를 펼치고 과일과 몇가지 안주에 술을 따르고 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절하고 나서 갑자기 묘에 대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화하시듯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들 데리고 왔습니다. 훌륭하게 잘 컸죠?"

그날 아버지가 색깔있는 안경을 끼고 오셔서 눈을 잘 볼 수가 없었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냥 그 모습이 나중에도 자꾸 생각날 것 같았습니다. 헌데 그건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와 이별한  제가 직접적으로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감정은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모습. 그 모습 자체가 그리울 거란 생각이 든거죠.

그리움이란 것은 이렇게 연쇄적으로 혹은 프랙탈적으로 작용하는 감정이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명확하게 정리된 형태의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냥 어렴풋한 느낌같은 거였지만 나중에 꼭 이 느낌에 대한 감정을 글로 표현해보고 싶다고도 생각했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노스탤지어에 대한 영화입니다. 영화는 현재를 살아가는 독자가 1980년대의 소설을 읽고, 소설가는 소설속에서 1960년대의 제로 무스타파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제로 무스타파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무슈 구스타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액자형태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이 영화의 훌륭한 점은 노스탤지어의 정서가 프랙탈적이라는 것을 영화의 내용뿐만아니라 형식과 정교하게 꾸며진 미장센을 통해서 보여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더욱 대단한 점은 독특한 이야기 속에서 저와 같이 개인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면서 그리움이 그렇게 연쇄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느끼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리움이 하나의 벡터처럼 과거를 향하는 화살표가 되고, 화살표의 끝에서 다른 화살표가 다시 과거로 향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어제의 세계'에 그리고 그 시대에 살았던 개인들의 정서에 닿을 수 있게 된다는 것. 이처럼 그리움이 과거로 향하는 벡터라면 과거의 정서를 이후의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은 "이야기"를 통해서 입니다. 제로 무스타파는 젊은 시절의 작가에게 이야기 하고, 젊은 작가는 나이가 든 후 자신이 쓴 책의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합니다. 


제가 느끼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결국 이야기를 통해 그리움으로 살아남는 것들의 아련함에 대한 영화입니다. 어떤 단편집의 끝에 나오는 평론가의 글에 "삶의 슬픔은 이야기되어질 때, 혹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 때 구원되어질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문구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뭐 구원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요즈음의 답답한 마음에 조금은 마음의 위로가 되는 영화였습니다. 


    •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래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 - 이성복 시인 '내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최근에 접한 말 중 가장 저를 위로해 주었던 말이었어요. 




      저도 제 아버지가 아버지를, 어머니가 어머니를 향해 품는 어떤 마음을 느꼈을 때, 아, 저들도 사람이구나. 부모님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시선을 얻고, 조금 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나저나 훌륭하게 자라셨고, 아버님께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신 것이 부럽습니다.. 전 여전히 제사 때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절하면서 "**이 좀 잘 되게 해주세요. 얘가 젤 문제예요" 하시는데 ㅎㅎ 

      • 이성복 시인의 책 읽어보고 싶네요. 예술가들의 통찰은 통하는 데가 있나봅니다. 당연히 제가 훌륭하진 않고요,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자랑삼아(아버지도 누군가의 아들이므로) 잘키웠다고 하신 말씀이겠죠. 우리가 친구에겐 자랑못해도 부모님께는 자랑하는 것처럼...

    • 불행한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 불행을 던져버리고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불행합니다.

      • 불행한 사람이 있더라도 한사람이 온전히 다른 사람을 구원해줄 수 있을까요. 그분만이 감당해야 할 일정 부분의 몫이 있을겁니다. 영화 밀양에서 송강호가 한 것처럼 옆에서 그냥 지켜봐주고 조금씩 도와주고 하는 거겠죠..

    • 극장을 나오자 마자 토마시 님의 리뷰를 읽었는데 좋았어요. 리뷰가 여운을 더해주었네요.


      저는 오늘 영화를 보며 웨스앤더슨을 좋아하던, 아마 다시 못 만날 사람을 추억했습니다. 하, 엔딩을 보고나니 아주 많이 그립더군요. 

      • 리뷰가 좋았다니 저도 위로가 됩니다. 감탄사 '하' 가 이렇게 묵직하게 다가오는 군요. 위의 글처럼 이야기하면서 평안해 지시길 바랄께요~!

    • 토마시님 글, 마음에 들어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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